1997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 현대시장 부근에 ‘심포니아’라는 클래식 고전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교직에서 은퇴한 주인장은 건물주로 자금을 털어 고전음악 감상실을 만들었다. 나는 당시 클래식 동호회 멤버들 사이에 끼어 한 달에 한두 번 방문해서 좋아하는 레퍼토리를 골라 음악을 청음했다.베토벤 3번, 6번, 9번, 쇼팽 2번, 말러 2번, 쇼스타코비치 11번, 베버의 ‘마탄의 사수’ 등 비교적 대편성이나 오페라곡 위주로 즐겨 들었다.카페 내 설치된 모든 오디오의 기억은 안 나지만 프리앰프 마크 26과 스피커는 클립쉬를 썼다. 공간에 비
삶에서 지금까지 휘어져 구불거리며 노곤하고 피곤하게 따라오는 추억들이 따라온다. 1982년 친구와 11월 만두공장에서 보름간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아침 8시 출근해서 저녁 6시 퇴근에 점심시간도 짧다.서울 용산역사 왼쪽에 지금은 수입차 매장으로 바뀐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높은 단층 건물은 위로는 오래된 낡은 목재로 만들어진 보들에 얽혀있었다. 지붕은 양철과 슬라브가 섞인 양철 판으로 올려진 막힌 공간이 없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쾌쾌한 공장 분위기였다.나는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이유로 일당 5000원에 10시간
코로나19 이전 시대에 그려놓은 산 그림을 보며 나는 겨울산에서 추운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올 때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잠에서 다시 깨어나 죽었다 다시 살아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나는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살며, 하루를 사는 동안 인생의 탑을 쌓는구나’하고 새벽에 선화를 그리는 제운 스님의 책을 읽다가 깨우친다.금강산 돈도암 바위에는 언제 새겨진 모를 수백년 된 선승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후학들은 진심(瞋心)을 내지 마십시오. 저도 한때 이곳에서 지내다 갔습니다.”불교에서는 현재 찰나, 이 순간을 중요하다
2022년 마지막 끝자락에 한겨울 서울 남대문시장을 찾아갔다. 예전처럼 사람들은 없지만 여전히 어릴 적 시장의 풍경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했다.성인이 되어 이 자리에 다시 서보니 이젠 삶의 터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느낀다. 이제는 나도 성인이 되어 세상의 모든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그림의 한 모습으로 들어가 있다.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시장, 모퉁이의 연탄 화덕의 구운 가래떡의 맛과 배고픔을 이길 때 사람들 사이로 느껴지던 추위는 여전히 세월의 바람과 같다.어린 시절 그 배고픔…. 그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마음
책상 정리를 하다가 문득 그동안 사용했던 물건들을 유심히 보았다. 이런 미물들도 나와 더불어 떼가 묻어 몸뚱이를 굴려서 많이 헤진 늙은이의 몸처럼 비틀어져 말라 있었다. 왠지 이제 늙었다는 거울 속 모습에 그동안 세월 속 풍경이 흑백영화를 보듯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그동안 수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노물(老物) 취급을 했던 작은 물건들이 새삼스레 예뻐 보이는 풍경에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책상만 바라보았다.요사이 머리 염색을 해볼까? 하며 생각을 많이 한다. 사실.. 나의 머리카락색은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 눈 꽃송이를 뿌린 것처럼 하얗게
중국 근대 소설가 바진이 외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허름한 여관에 기거할 때 이야기다.바진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재산을 많이 물려받은 부유한 친구가 바진의 숙소로 찾아와 대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그 부유한 친구가 이미 문단에 데뷔한 바진의 글을 읽고 이리저리 개인적인 평가를 해대는 대목이 나온다. 글 속에는 친구의 평론을 젊잖게 표현했지만, 작가 자신은 내심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대학시절 같은 문학도 출신으로서 바진은 이미 프랑스 유학 때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며 많은 유럽의 도서를 번역까지 한 번역가로서도 활동하는
12년 전 중국에서 하던 마지막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돌아왔다. 급하게 사무실 책상 하나만 빌려 쓸 수 있냐?고 주변에 부탁했지만 여의치 않아 서울 신도림 다리 건너 독서실에서 한 달을 생활한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는 다른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다며 숨기고 독서실에서 온종일 시나리오 쓰고 책만 읽다가 이어폰으로 라디오를 듣는데, 김민기의 '봉우리' 가 흘러나왔다. 시간은 겨울로 접어들고 살얼음이 얼어가던 시기였다. 신세가 처량했는지 노래 '봉우리'를 들으며 누가 들을까 봐 칸칸이 막은 독서실 작은 책상에 엎드려 몰래 입을 막고 울던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리고 저 둘은 왜 싸우고 있는 걸까? 가끔 작품을 위해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마다 사는 시공간은 같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의 물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듯이 취미도, 좋아하는 음식도, 그리고 미래를 위해 설계하는 그림도 다르다. 때문에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즐거운 일만 만들 수 없는 것도 사람마다 다른 생각, 환경, 그리고 나름의 각자의 이익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행동에서 나온다는 결과도 알 수 있다.나는 길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때로는 이동 중에 타인의 삶 속의 이야기를 몰
초겨울이면 산동네 가가호호 지게를 멘 무장수, 배추 장수들이 골목 사이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누비며 김장 무와 배추를 등짐에 실어 날랐다.늦가을 장사꾼들은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지게를 나무 지팡이 하나로 굽은 몸을 지탱하며 느리게 숨을 고르며 올라왔다. 겨울이 오기 전 일곱 식구가 먹을 김장 배추를 공동 주택 같은 철문이 있는 언덕 골목길까지 올라오는 장사꾼들을 보며 어린 나이에도 힘들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냉장고가 없던 시절 문밖에 튀어나온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이 유일하게 그들의 수분을 채울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매년
수필가 박연구 선생은 추사의 ‘묵란도’를 벽에 걸어놓고 아침마다 일어나 상념에 젖거나 그림에 들어간 샘에 물을 고이게 하는 상상을 하며 어설픈 글을 썼다고 책에 써 있다. 그 생각에 지난해 친구 황 박사가 비싼 난이라며 어린 난을 한 분을 주었는데 남산 사무실 구석에 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어느날 우연히 난초가 말라 비틀어져 죽은 걸 생각했다. 평소 동물이나 화초에 별 관심이 없는 터라 죽고 말라 비틀어진 작은 생명 나는 참 무감(無感)하구나 하며 스스로 죽은 난을 생각하며 자책을 하였다. 박연구 선생은 난을 좋아하지만 비싼 난을
“아빠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10년 전 식사 중에 아들이 뜬금없는 질문을 하자 나는 “감동을 주는 사람”라고 말해 주었다. “감동은 주변에 많다. 그래서 사는 동안 한 번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 감동이란 음악이나 그림이나 춤이나 새로 개발된 술이나 음식이든 시, 수필, 소설이든간에 모든 세상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고흐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 자신이 행복해했던 밤하늘의 별을 아직도 100년 넘게 세상을 비추며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쇼팽의 ‘녹턴’, 베이토벤
수년 전 만화가 허영만 선생이 관상학의 대가 신기원 선생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관상학을 배워 ‘꼴’이란 작품을 출간하셨다.만화책으로 본 꼴에는 관상과 수상 등 각각의 사람의 행동과 말투까지 분석해서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이어 나가는지 보여준다.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면 서로 닮은 꼴을 볼 때가 있다. 심지어 어떤 부부는 형제보다도 더 닮았는데, 닮을수록 부부는 더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한다.앞서 언급한 꼴에서 사람마다 ‘꼴’이 있는데 그 ‘꼴’이란 단어는 명사다. 꼴은 알고보니 사람의 모양새나 행태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라고 사전에
만추(晩秋)입니다. 오늘은 지난주보다 기온을 더 낮춘 바람이 코끝을 스치며 저를 깨웠습니다.생명의 새싹이 돋는 봄이 탄생의 시작이라면 가을은 어쩌면 한 절기의 마지막 그 해가 떠나가는 길이라 생각됩니다.그리고 겨울은 우주로 떠나버린 계절들을 영원히 추모하는 침묵과 안식의 시간이라 비유를 해 봅니다.그래서 가을은 만남보다 헤어지거나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며 다른 계절보다 센치하게 감정을 더 돋우게 됩니다.얼마 전 지리산을 종주하며 산 아래를 보니 마지막 가을 영혼에 담긴 고사목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사람의 모습과 닮았을까
빌헬름 호프만이라는 사람을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클래식 애호가라면 작곡가 오펜바흐(1819~1880)의 마지막 작품이자 오페라 처녀작 ‘호프만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정확한 그의 이름은 에른스트 테오도르 빌헬름 호프만이고 1776년 1월 24일,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출신이다.오후 93.1FM 클래식 방송을 통해 빌헬름 호프만이 모차르트의 광팬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특히 재미있는 건 호프만이 당시 유명한 판사였다는 사실이고, 낮에는 재판하며 저녁에는 선술집에서 문학과 철학, 낭만에 대해 지
“너 나 알아?” 살면서 누구나 이런 말을 한두 번 정도 주거나 받았을 것이다. 상대방을 알거나 모르고의 차이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많이 담고 있냐는 말이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습관, 습성, 가족관계, 좋아하는 것, 못하는 것, 심지어 그 사람이 못 먹는 음식까지 많이 알수록 그 사람과의 지내는 기간 동안 쌓아온 정분(情分)더 깊어지는 것이다. “쉽게 헤어진다”는 것에 사람들은 “아쉬움도 없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즉 담아놓은 정분이 없으니 빈 봉지 버리듯 큰 미련이 없다는 뜻이다.심지어 결혼해서 헤어지기 전 부부싸움에서도
60번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먼 행성의 번호인증 알았다. 지구에 도착해서 받은 번호가 곧 60번이라는 통보를 부여받는다. 이제 주변에 70번도 많고 80번 번호를 쥐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번호가 높을수록 작은 숫자를 지닌 여행자들을 위해 방을 비워주듯 이 지구라는 행성을 떠나야만 한다.그렇게 요즘은 번호가 높은 사람일수록 어느날 갑자기 떠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이곳을 떠날 출발 날짜도 모르면서 끊임없는 사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있다는 걸 안다.어제는 아내와 식사를 했다. ‘화성에서 온 이
유명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K를 내 작품 때문에 조언을 구하고자 여러 지인들을 통해 수소문을 했다.그러나 그를 찾는다는 내게 돌아온 소식은 그가 파키스탄으로 떠나 현재 여러 나라를 지나 일본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듣고 보니 그는 무작정 자유를 찾아간다며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보헤미안처럼 한국을 떠난지 몇 해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몇 년 전 여행 중에 만난 일본 여성 여행가와 같이 주저앉아 낯선 곳에 정착해 지내기도 하고, 그곳이 질려지면 다시 떠나 낯선 장소로 무작정 떠난다고 한다.검은 뿔테 안
가을이다. 오후 내내 뜨겁다가 저녁이면 ‘양념이 배듯 가을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듯 바람 속에 가을이 들어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이 있다. 나는 몸에 열이 많아 더위를 많이 타는 여름을 싫어한다. 반대로 추운 겨울을 좋아한다. 혹독하게 얼어붙은 겨울산의 풍경도 좋아하지만 특별히 단풍이 떨어지기 전 동계 파발병이 당도하는 초겨울이나 늦가을 계절을 가장 좋아한다. 산을 좋아해서 산에 매 주마다 가지만 등반이나 워킹으로 사람들이 모인 장소보다 혼자 아무도 없는 정상 근처나 능선의 한 곳에서 서늘하게 하루를 지내는 것이 가장 좋아하는
재개발로 모습이 바뀌는 서울 방배동 사이사이 골목길에는 오래된 개인 주택들이 많았다. 특히 집집이 큰 감나무들이 한그루씩은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골목길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본네트 위에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나는 땅에 떨어진 빨가스럼한 홍시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고 둘로 갈라 한입에 쏙하고 집어삼켰다. 시간이 지난 기억에도 오물~오물...아!~~단맛에 여운이 아직도 입안에서 침샘을 자극한다.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서리한 듯... 그 맛이 얼마나 다디달던지.. 아!~~ 가을에 처음으로 자연이 준 사탕을 맛보던
나이가 들어가며 주변에 재산이 있든 없든 자주 전화로 안부를 묻는 사람이 많을수록 덜 외로워진다고 한다.아무도 전화를 안 해주는 건 타인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자신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최근에 술자리에서 자주 나오는 대화 중에 사람들과의 친밀도에 대한 주제가 많았다.같은 건물에 살거나 지척에 거리를 두고 있는 형제라도 진정한 관심이 없다면 자주 연락을 안 하게 된다. 반대로 지구 반대편 외국에 사는 친구라도 문자나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면 자신에게 지속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