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로 모습이 바뀌는 서울 방배동 사이사이 골목길에는 오래된 개인 주택들이 많았다. 특히 집집이 큰 감나무들이 한그루씩은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골목길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본네트 위에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땅에 떨어진 빨가스럼한 홍시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고 둘로 갈라 한입에 쏙하고 집어삼켰다. 시간이 지난 기억에도 오물~오물...아!~~단맛에 여운이 아직도 입안에서 침샘을 자극한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서리한 듯... 그 맛이 얼마나 다디달던지.. 아!~~ 가을에 처음으로 자연이 준 사탕을 맛보던 선물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홍시를 보며 집주인은 왜 수확을 안 하는지? 궁금했지만 살던 동네 모두 감을 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물론 관상용으로만 보아도 눈으로 먹는 상상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감나무에 대한 오래 전 추억이 있다. 중학 시절... 산동네 덕지덕지 엉긴 양철판과 기와 슬레이트 지붕 사이의 언덕에서 바람을 타고 학교를 가다 보면 마을 입구에 제법 산다는 커다란 양옥집이 하나 있었다.
그 양옥집 파란 대문 위로 주렁주렁 감이 매달린 커다란 감나무가 한그루 보였는데 가을만 오면 감을 서리하러 온 아이들을 향해 짖어대는 강아지 소리가 골목을 꽉 채웠다.
아이들은 가을뿐만 아니라 다른 계절에도 그 집을 기웃거렸다. 저녁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잔잔한 피아노 소리를 만들어주는 예쁘장한 우리 또래의 계집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감이 익어가던 어느날... 까까머리 친구 하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감 두 개를 손에 쥐고 나타났다. 나는 단번에 파란 대문 감나무 집의 감이란 걸 알아채고 하나라도 얻어먹고 싶은 마음에 대단하다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시무룩한 표정의 상고머리 친구는 들고 있던 감 두 개를 내 손에 모두 쥐어주고 뒤돌아서서 골목길을 힘없이 올라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감나무 위로 올라가 있는데 강아지 소리에 뛰어나온 소녀와 식구들에게 들켜 혼이 났다고 한다.
그런 후 소녀의 어머니가 쥐어준 감 두 개를 가지고 올라오던 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감나무의 감이 아니라 소녀의 마음을 훔치려는 것을 들켰다고 생각이 되어 감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을까 봐 속상한 마음을 비친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추석 이맘 때 주렁주렁 열렸던 감나무의 빨간 홍시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던 감나무 집의 딸 수 없었던 소녀의 마음이었다.
이제 푸른 철판에 하얀 구름을 그려놓은 빨간 홍시를 자주 볼 수는 없지만, 가을만 되면 감나무집 풍경에 따뜻한 시절 이야기 하나씩 따서 먹으며 다디단 인생의 맛을 삼킨다.
글쓴이=주홍수 애니메이션 감독-만화가 sisi9000@naver.com
주홍수 감독은?
30년 넘게 애니메이터로 만화가로 활동을 해왔다. 현재 자신의 원작 OTT 애니메이션 ‘알래스카’를 영화사 ‘수작’과 공동으로 제작 중이며 여러 작품을 기획 중이다. 그림과 글과 엮어낸 산문집 ‘토닥토닥 쓰담쓰담’을 2022년 1월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