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 기자의 e스팟] 디지털 치매와 온라인게임 '리니지'

요즘 아내나 애인 이외에 타인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사람을 만나기가 좀체 힘들다. 심지어 부모나 자식의 번호도 여기저기 찾아봐야 할 지경이다. 가입자 수 3500만 명을 돌파한 국내 이동통신이 한 원인이다. 현재 한국인 중 75% 이상이 휴대 전화를 이용하고 있다.
 
휴대 전화를 잃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가 패닉(공황)이다. 인간관계도 뚝 끊긴다. 회복에만 6개월 이상 걸린다. 번호를 따로 저장해 놓지 않을 경우 자신의 네트워크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절연을 각오해야 한다.
 
수업 시간에 벨소리가 나면 무조건 1주일간 전화를 압수한 한 대학 교수의 말이 재미있다. 1주일 후 휴대 전화를 돌려줄 때 학생들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물에서 건진 생쥐꼴이더란다. 그럴 만하다. 친구들로부터 "왜 전화를 씹어" 등 질책과 힐난은 보통이다. "왜 날 무시해"라는 호통과 비난성 문자 메시지는 물론 심지어 실종 신고 해프닝도 일어난다고 하니까 말이다.
 
요즘 세상은 디지털 기기와 뗄려야 뗄 수 없이 서로 기억을 공유한다. 아니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게 맞을지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휴대 전화 하나 잃는 것은 영락없이 자신의 기억 일부를 송두리째 날리는 것과 같다. 기억의 파일이 삭제되는 것에 비유해 '디지털 치매'라는 말도 유행이다.
 
디지털 치매를 조장하는 것은 전화뿐 아니다. 비틀스 노래를 한글 가사로 적어 따라 불러 봤거나,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 반복해서 듣던 종족은 이제 완전히 천연기념물이다. 노래방에 가서 번호를 누르면 가사가 떡 하니 뜨는데 굳이 가사를 외워 무엇하랴. 최근엔 내비게이터까지 가세했다. 버튼 하나로 목적지까지 도로·교통 사정이 실시간으로 서비스된다. 지하철 노선도 포털이나 모바일에서 찾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이가 40대 중반으로 전주와 부산에 사는 두 딸과 서울에 사는 60대 후반의 세 모녀는 매주 목요일 오후 세 시에 온라인 게임 <리니지> 사이트에서 만난다. 사이버 공간이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수다를 떨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고스톱이나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이 치매에 특효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봤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온라인 게임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람 사이 거리를 좁혀 주는 마음의 사랑방이고, 치매 방지의 새로운 예방약이기도 하다. 실제 노인 요양원에서는 온라인 게임을 권장하기도 한다니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눈앞의 현실은 아날로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디지털은 소통·매개·대화 과정일 뿐이라는 점이다. 제 아무리 디지털 기기가 판을 쳐도, 눈이 팽팽 돌아가는 속도의 회오리가 세상을 쓰나미처럼 덮쳐와도, 그대 그리고 나의 느낌은 오롯하게 아날로그다.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김남주 <사랑1> 중에서).그래 사랑은 아날로그다. 제발 이것만은 잊지 말자.

박명기 기자 [mkpark@ilgan.co.kr] 20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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