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셉수트, 진시황 등 소외된 인물 재발굴.... '시드마이어 문명' 비교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자부했던 필자도 ‘하트셉수트’라는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것도 역사책이 아닌 '문명온라인' 보도자료에서 말이다.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란다. 측천무후나 엘리자베스가 왕이 되기 수 천 년 전부터 고대 이집트를 쥐락펴락했던 여성이다. 이집트 하면 ‘클레오파트라’와 ‘람세스’밖에 몰랐는데 이런 걸출한 인물이 있다니, 게임에서 한 수 배웠다.
 
'문명온라인' 1차 CBT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게임은 시드마이어의 인기 시뮬레이션게임 ‘문명’을 온라인게임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재미는 다르겠지만, 난 역사적 영웅들의 리더십을 보는 재미로 문명을 한다. 리더십의 격돌이야말로 문명 시리즈가 추구하는 최고의 재미다.
 
생각해보라. 칭기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이 한 시대에 태어나 세계 패권을 놓고 한판 붙는다는 가정 자체가 가슴 벅찬 경험이다. 오직 문명에서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문명이 낳은 인기스타 ‘간디’도 같은 맥락이다. 비폭력 평화주의의 상징인 간디가 무자비한 전쟁광으로 나타났을 때의 충격은 그 자체가 반전의 재미다.
 

▲ 문명온라인 4대 문명의 리더들, 왼쪽부터 하트셉수트(이집트)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마), 진시황(중국), 몬테주마 2세(아즈텍 문명)
이처럼 문명에서 리더십은 중요한 개념이다. 문명5에서 영국의 리더는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바다를 장악한 영국은 게임에서도 바다의 최강자로 그려진다. 나폴레옹은 어떤가. 그가 다스린 프랑스는 문화강국이자 최강의 소총 병을 가긴 강대국으로 나온다. 또, 오다노부나가의 일본은 사무라이를 동원한 강력한 전투 유닛이 특징이다.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문명의 특성이 달라진다. 때문에 그 나라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 문명의 리더로 선택된다. '문명온라인'에선 4개의 문명이 등장한다. 고대문명의 발상지 이집트, 황하문명을 꽃피운 중국, 지중해 거대 제국 로마,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 아즈텍 문명이다.

람세스 빼고 하트셉수트 발탁, '제왕적 리더십'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선택
그런데 이들 국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부분들이 많다. 이집트가 그렇다. 지금까지 이집트의 간판급 리더는 ‘람세스 2세’다. 람세스는 이미 소설과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이집트 파라오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도 히트쳤고, 모세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애굽 왕도 람세스 2세다.
 
그는 히타이트를 정복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래선지 람세스가 이끄는 게임 속 이집트는 전쟁에 강하다. 이집트 종족 특성인 ‘왕릉’과 ‘이륜전차’는 타국을 정복 할 때 유용한 기술이다. ‘왕릉’을 건설하면 약탈할 때 전리품을 2배 이상 챙길 수 있고, ‘이륜전차’는 말 자원 없이 원거리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데 문명의 터줏대감 람세스가 '문명온라인'에선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의외의 리더가 그 자리에 올랐다.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다. 이집트 4대 파라오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인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이자 공동 파라오가 되어 이집트를 다스렸다. 여자라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항상 남장을 하고 정치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녀는 전쟁을 자제하고 주로 상업과 농업 발전에 힘을 쏟았다. 적어도 그녀가 통치했던 기간만큼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평화스러웠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이집트 리더로 장기집권 해왔던 람세스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람세스의 ‘제왕적 리더십’보다는 하트셉수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택한 것이다. 그에 따라 게임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엄청난 변화다.

마오쩌둥 빼고 진시황 복권, 중국 문명 재해석 돋보여
진시황의 복권도 재미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은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황제로 통한다. 실제로 중국역사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1위가 진시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문명 시리즈와 인연이 없었다. 4편에서 마우쩌둥(모택통)과 함께 얼굴만 비추었을 뿐이다. 중국의 간판급 리더는 마오쩌둥이었다(1, 2, 4편). 5편에서는 마오쩌둥 대신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가 등장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최고 영웅인데도, 유독 문명에서는 박한 대우를 받았다. 이유가 뭘까.
 
문명 시리즈에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역사관이 나타나 있다. 문명 1편이 발매된 1991년, 중국은 개방되기 전의 공산국가였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는 판국에 중국은 여전히 폐쇄적인 공산국가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니 시드마이어 입장에선 마오쩌둥을 리더로 내세울 수밖에 없다. 문명5의 측천무후나 간디도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표현됐다. 영국 엘리자베스는 근엄한 여왕의 포스를 보여주는데 반해 측천무후는 표독한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또,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진시황은 서양인의 눈에는 그저 나라 망친 ‘폭군’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중국의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진시황이 소외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개방화 정책으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엑스엘게임즈는 ‘폭군’으로 제단 됐던 진시황의 가치를 끌어 올렸다. 공산당 이미지에 갇혀 있던 마오쩌둥보다 중국 역사를 상징하는 진시황의 리더십을 더 주목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땠을까. 문명 시리즈에서 한국 간판리더는 태조 왕건(3, 4편 등장)이었다. 한국의 국제명칭 고려(코리아)를 창건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끈 고려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문명4에 묘사된 태조 왕건은 생김새부터가 중국인과 비슷하다. 멋지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다른 나라 영웅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5편에 등장한 세종대왕은 그나마 봐줄만 했지만 아직은 존재감이 약하다. '문명온라인'에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시드마이어 아닌, 송재경의 역사관 기대
엑스엘게임즈는 실력 있는 게임사다. 원작자 시드마이어가 믿고 맡겼으니 게임성은 믿을 만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제대로 된 역사관을 반영해야 한다. 문명의 가치는 단순한 재미뿐만 아니다.
 
그 안에는 인류 역사와 인간의 삶,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고찰이 있다. 지금까지는 시드마이어의 눈으로 본 문명이었다면, '문명온라인'은 송재경의 역사관이 반영된 게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작에서 왜곡 됐던 역사관을 바로 잡고 새로운 리더십을 발굴해야 한다. 하트셉수트와 진시황 같은 인물들을 재평가했다는 점에서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적어도 게임을 기다리며 이집트 역사책 한 권쯤은 읽어보게 했으니 말이다.
 

▲ 문명3의 왕건, 복식이나 생김새가 일본사람 같다

 
▲ 문명4의 왕건, 이번엔 중국사람 같다

 
▲ 문명5의 세종대왕, 이제 좀 봐줄만 하지만 존재감은 여전히....;;

한경닷컴 게임톡 이덕규 기자 ldkg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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