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첫 단독 해외출장 ‘블리즈컨’ 여행기 '화려한 데뷔전'

1년 중 딱 한 달, 11월만 빨간 날(공휴일)이 없다. 그래서인지 11월은 정 없는 달, 삭막한 달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게임업계의 11월은 조금 다르다. ‘일복이 터진 달’이다. 각종 게임쇼가 몰려있기 때문이다. 특히 2013년 일정은 가히 살인적이다. 11월 8일과 9일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 ‘블리즈컨’이 열렸다. 또 11월 13~17일 ‘게임대상’과 ‘지스타’가 열린다.

블리즈컨에 다녀온 기자는 비행기 시간까지 포함해 무려 연속 11일간 출장 마라톤을 뛰어야 한다. 이번주 레알겜톡에서는 11일간의 출장으로 블리즈컨과 지스타에 다녀온 체험기를 소개한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스크롤 압박이 심할 예정이다.

■ “내가 블리즈컨이라니...!”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정확히 8개월하고 17일 만에, 첫 단독 해외 출장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염원하던 블리즈컨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오래 즐긴 덕에 블리즈컨은 이름만으로도 “내가..블리즈컨이라니...! 내가..!! 블리즈컨이라니!!!!”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행사다.

가기 전부터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어 올라 출발 전부터 땅에서 10cm 정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부러움 반, 걱정 반이었다. 11일간 연속으로 출장을 가야 하는 탓에 시차 적응은 트롤 같은 재생력으로 이겨내야 할 뿐만 아니라, 2년만에 열리는 블리즈컨인 만큼, 소개되는 게임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2’,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디아블로3’, ‘하스스톤’으로 총 5개나 됐기 때문에 일이 많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첫 번째는 블리즈컨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처음으로 떠나는 단독 해외 출장이기 때문이다.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과 동시에 ‘자유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지만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놀러가던 때처럼 설렘이 가득했다.

■ “아주머니 몹의 강력한 어그로와 힐러마마”

드디어 떠나는 날,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가족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 난이도 ‘상’의 출국 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비행기에 올라타 뿌듯함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 첫 번째 시련은 찾아왔다. 옆 자리에 앉은 파티원(?)들의 공격이었다.

우선 3시 비행기지만 아침 10시부터 공항에 도착해 통로쪽 좌석을 얻은 기자에게 가운데 앉은 아주머니 두 분이 자리를 바꿔달라는 부탁이 시작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동료 기자와 11시간이라는 긴 비행을 함께할 수 있어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러나 이 어그로(위협 수준)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주머니 특유의 종특(종족 특성)인 친화력과 큰 목소리의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와 한국의 시차는 17시간이다. 도착해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비행기 안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하는데, 긴 비행시간이 지루하셨던 두 분의 아주머니는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심지어 다른 좌석의 승객에게까지 말을 붙이시며 시끄럽게 광역 도발(넓은 범위의 도발)을 시전하셨다. 결국 11시간의 비행시간 중 2시간 남짓한 시간만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예민한 상태로 캘리포니아 도착한 기자에게 준비된 두 번째 시련은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통과해 버스 타고나서였다. 분명 여자 기자가 2명 더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봐도 여자 기자는 혼자였다. 슬며시 물어보니 오기로 했던 여자 기자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취소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에서도 못해본 ‘공대의 아름이’(대학교 공대의 여학생)를 경험할 수 있었다. 힐러(지원병)가 귀한 공격대 파티에 들어온 ‘사제마마’와 마찬가지였다. 홍일점 놀이도 나쁘지는 않지만, 버글버글한 남자들 사이에서 ‘군중 속의 외로움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첫날 일정이 ‘아울렛 쇼핑’이라 외로움이 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련들은 결국 행운이 되었다. 잠을 못 잔 탓에 얼떨결에 시차 적응을 하루 만에 했다. 피곤해서 저녁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또한 ‘아름이’가 된 덕에 동료 기자들의 따뜻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혼자 힐러로 레이드(대규모 사냥)를 뛰면서 힐템(힐러 아이템)은 무조건 득하는 기분이었다.

■ “블리즈컨 분위기는 young, wild and free”

첫날 모든 시련을 경험한 기자에게 드디어 블리즈컨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기이한 괴성에 눈을 든 기자의 눈앞에는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블리즈컨에 참가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많은 관객들이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모두 하나가 되어 소리를 지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급히 준비를 하고 행사장으로 들어간 기자의 눈앞에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네 단어로 말하자면 ‘young, wild and free’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어린아이 같이 순수하고 자유롭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노부부는 함께 코스프레를 하고 손을 잡고 행사장을 돌아다녔고, 부부와 아이가 함께 즐거운 표정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했다.

한국 게이머들이 ‘마사장’으로 불리는 마이크 모하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CEO가 오프닝 연설을 할 때도 즐겁고 자유로웠다. 어떤 남자는 마이크 모하임에게 “I love you!!!!”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개발자들은 관객과 대화를 하며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전체적인 오프닝 분위기는 프리젠테이션이 아니라 회사 야유회 같은 느낌이었다.

■ “어서와, 5시간 인터뷰는 처음이지?”

하지만 이렇게 후끈한 블리즈컨에서 놀아보기도 전에 빼곡한 인터뷰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무려 5개의 인터뷰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있어, 기자실과 인터뷰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블리즈컨에 오기 전 아침마다 샤워를 하면서 ‘개발자와 어떤 이야기를 나눠볼까?’라며 영어 농담까지 연습했던 순간이 무색해질 만큼 블리자드 개발자들과는 정해진 인터뷰 시간 외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폭풍 같은 일정에 첫날 새벽 3시까지 인터뷰 기사 5개와 개막식 기사 2개, 이벤트 포토기사 1개, 게임 소개 기사 3개를 쓰면서 개인 신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둘째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터뷰 3개를 진행하고 행사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 “난 누구인가. 여긴 어딘가”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뇌의 단백질이 자잘하게 분해되어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멍하니 10분을 앉아있다가 문득 행사 둘째날인데 게임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터덜터덜 PC로 걸음을 옮겼다. 5개의 게임 중 무슨 게임을 해볼까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한 번도 플레이 안 해본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을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30분 가량을 타임워프했다. 다만 기억이 나는 것은 ‘티리엘’ 캐릭터를 선택해 상대편 캐리건을 쫓아다니며 5번 정도 죽이고 나서 느낀 쾌감뿐이었다.

누군가 기자에게 ‘당신에게 게임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라고 묻는다면 ‘refresh(재충전)’라고 대답하고 싶다. 30분 가량의 게임 충전은 3시간의 의욕까지 충전시켜주어 기사를 쓰며 하얗게 불태울 수 있었다.

마지막 기사를 쓸 때의 감동은 마라톤을 완주한 느낌과 비슷했다. 창문을 열고 ‘드디어 마감 끝!’이라며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비록 생각한 것만큼 현장 취재를 오래 하지 못해 아쉬움은 있었다. 그래도 취재 일정을 꾸역꾸역 소화해낸 자신이 대견(?)했다.

■ “미국은 축제 분위기, 지구 반대편 한국은 초상집 분위기”

4박 6일간의 출장에서 새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삶에서 게임은 떼어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 11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게임 덕분이었다.

꼭 게임 기자라서가 아니다. 어그로를 끌던 50대 아주머니도, 옆자리에 앉은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예쁘장한 태국 아가씨도 자연스럽게 좌석 앞 화면으로 퍼즐과 보드 게임을 즐겼다. 그것도 아주 오래.

블리즈컨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멀록인형’ 하나에 열광하고, ‘하스스톤’ 카드 한 장에 환호를 지르며, ‘디아블로 잡는 게이머’ 코스프레에 빵 터지며 공감하는 모습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미국에서는 게임 축제를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고 있는데, 지구 반대편 17시간의 시차를 가진 한국은 정반대였다. 게임을 마약과 동급으로 무시무시하게도 ‘중독 물질’로 규정했다. 17시간 시차는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거리지만 사람 사는 동네인 건 매한가지다. 그런데 왜 한쪽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콘텐츠가 다른 한 쪽에서는 울상 짓고 있어야 할까.

어찌되었든 별 탈 없이 11일 간의 출장 마라톤이 반환점을 돌아 한 주의 반이 훌쩍 지났다. 미국에서 보낸 일정은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시작했지만 스스로 대견하게 마무리했다. 부산에서 보내는 나머지 절반의 일정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하지만 블리즈컨에서 '출장 예방주사'를 맞고 오니 '이쯤이야' 하는 자신감이 불끈 솟기도 한다. 이제 제법 게임기자가 된 것 같다.

한경닷컴 게임톡 황인선 기자 enutty4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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