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의 명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 진출

[소니 TPS-L2]
(이미지 https://sg.carousell.com/p/vintage-sony-walkman-tps-l2-marvel-cassette-headphones-guardians-of-the-galaxy-ironman-avengers-122254582/)

1990년대를 추억하는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면 10대~20대 젊은이들의 필수 아이템 중 하나가 손으로 들고 다니는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이다. 지금은 MP3플레이어조차 스마트폰에 그 기능을 흡수당해 상당부분 퇴색한 상태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은 집에서 전축이라고 하는 장비를 필요로 했다. 미니 냉장고만한 크기의 전축은 밖으로 들고 다닐 수 없을 뿐더러 힘이 좋아 들고 다닌다 해도 전기 공급이 문제였다. 그 뒤에 휴대용이라고는 하지만 어깨에 메고 다닐 정도로 큰 가방만한 플레이어가 나왔다. 미국 영화에 보면 흑인형님들이 자주 어깨에 둘러 메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손바닥만한 크기의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1979년 소니(SONY)에 의해 세계 최초로 개발되어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워크맨이다. 물론 세계 최초로 완성품을 선보인 것은 소니였지만 기계적인 설계에 대한 개념은 독일계 브라질인 발명가인 안드레아스 파벨(Andreas Pavel)이 먼저 세웠다. 그는 소니보다 먼저 1972년 관련 특허를 출원하여 소니를 상대로 20년 넘게 특허권 침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2003년 소니는 파벨에게 1000만 달러에 금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하기도 했다.

[이전의 휴대용 플레이어]
이미지 - 유투브(/watch?v=0xs8KyIjmB8)

비록 특허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해도 소니에 의해 1979년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개발되고 1980년대에는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사실이다. 소니의 뒤를 이어 파나소닉이나 도시바와 같은 일본의 거대 가전업체들 역시 뒤따라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시장에 뛰어들었고 그 뒤를 이어 한국의 삼성과 금성, 대우 역시 이 땅에 새로운 휴대용 음악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업체의 휴대형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보다는 일제를 선호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선두는 소니였다. 소니의 워크맨은 모든 아이들의 꿈 같은 아이템이었다. 필자 역시 부모님을 몇 달을 달달 볶아 간신히 영어 공부에 꼭 필요하다는 핑계로 국내 모 업체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선물 받았지만, 소니 워크맨을 들고 다니는 친구들을 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일단 무엇보다 두께부터가 달랐다. 음질이야 뭐 그 나이에 뭘 안다고 말 할 거리도 안되지만 보이는 외견은 국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소니 WM-EX7]
(이미지 https://www.goodspress.jp/features/26230/5/?media=25373)

이 아름다운 자태에 필자와 같은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도 일제 앞에서는 맥 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죄송합니다! 조상님!). 일반 건전지를 넣는 뚱뚱한 국산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와는 다르게 일명 ‘껌전지’라 불리는 막대형 충전지를 쓰는 소니의 워크맨은 손에 착 감기는 느낌부터 왠지 음질도 다르게 느껴졌다(실제로도 달랐다).  

그 당시 ‘소니’라고 하면 ‘워크맨’, ‘워크맨’ 하면 ‘소니’라고 할 정도로 소니의 워크맨은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소니의 뒤를 따라 파나소닉이나 아이와(aiwa)같은 업체가 상위를 선점하고 있었고 그 뒤를 삼성의 ‘마이마이’와 금성(현재 LG전자)의 ‘아하’, 대우의 ‘요요’가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로도 MD, CDP 등 휴대용 음악 재생 기기에 있어 소니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고 늘 유행을 선도하는 업체였다. ‘워크맨’이라는 단어 자체가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지칭할 정도의 일반명사 수준으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전후 50~70년대는 미제가 최고였던 시대였고 80~90년대는 일제가 최고였던 시절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결혼 혼수물품이나 집안에 가전제품을 구입할 때 일제가 최고였던 시대에서 국산 가전제품이 최고인 시대가 되었다. 국산 전자제품을 구하기 위해 오히려 해외에 구매대행까지 하면서 구입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걸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지금에야 한국 업체들의 가전제품이 전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 되었고 오히려 세계 최고라는 평가와 함께 역수입을 하는 사례도 있을 정도로 인기를 받기도 하지만 1980~90년대만 해도 미제가 최고였던 시절에서 일제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많은 제품들이 일제라고 하면 일단 믿고 구입하는 기술력과 신뢰의 상징이 되었다.

[닌텐도 슈퍼 패미컴]
이미지 - 유투브(/watch?v=L3AVAYS54Zs)

그 중에서도 1990년대 가정용 콘솔 게임기는 닌텐도가 꽉 잡고 있던 시기였다. 물론 세가와 함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닌텐도의 위상은 누구도 넘보기 힘든 독보적인 위치였다. 그리고 휴대용 음악 기기는 워크맨을 만든 소니가 최고였다. 소니의 워크맨이 한참 주가를 올리던 시기에 닌텐도는 패미컴에 이은 슈퍼 패미컴으로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을 독식하다시피 하며 승승장구 하던 시기였다. 소니의 워크맨 다음으로 파나소닉, 아이와가 있었듯이 게임기 시장은 닌텐도 다음으로 세가(SEGA)로 양분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평온하게 각자의 위치에서 제 각각 자신의 할 일을 하던 그 때에 1993년 난데없이 소니는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Sony Computer Entertainment)’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면서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 진출을 선언한다. 그리고 1년 뒤 1994년 12월 3일에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이 출시됐다. 후속 기종이 등장하면서 제품의 생명력이 다 할 때쯤인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이미 전 세계 1억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2016년 기준 통계로 총 3억대의 플레이스테이션이 판매됐다고 하니, 지구인 20명 중에 1명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을 갖고 있는 셈이다. 

처음 소니에서 가정용 콘솔 게임기를 출시한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전 세계의 게임기 업체는 물론이고 가전제품 업체 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아니 가전 제품 회사가 게임기를 만들어?”였다. 괜한 욕심에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하다 결국 본전도 못 건지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 어느 게임기 업체에서도 크게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닌텐도를 위시해 세가와 같은 게임기 개발업체뿐만 남코나 코나미, 타이토, 캡콤, 반다이, SNK, 스퀘어, ENIX 같은 게임 개발 업체들도 소니의 게임기 시장 진출 소식에 크게 관심 갖지 않았었다.

[SONY - PlayStaion]
이미지 - 유투브(/watch?v=6aXFNtEm7Hc)

당장 그들의 관심은 8비트 시절부터 피 터지는 싸움을 하며 16비트 게임기 시장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닌텐도의 슈퍼 패미컴과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에 이어 다음 32비트 시장에서 닌텐도 편에 붙느냐 세가 편에 붙느냐였다.

16비트 시장에서 늘 닌텐도에게 뒤처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세가는 32비트 시장에서만큼은 제대로 한 방 먹일 기세로 1994년 3D기능을 중심으로 한 게임기인 ‘세가 새턴’을 준비하면서 자신만만해 하던 중이었고 닌텐도는 8비트에 이은 16비트 시장에서 세가의 추격을 받는 강력한 1인자로 군림하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닌텐도는 난데없이 32비트를 건너 뛰고 64비트 게임기 ‘닌텐도64’를 선언했는데, 당연히 32비트 게임기로 시장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했던 많은 관련 업체들은 닌텐도의 ‘세가와 소니의 32비트 시장진출에 대한 추격을 일찌감치 따돌리고 64비트로 바로 간다’는 해명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 보다는 닌텐도와 세가의 2강 구도에 더해 새롭게 진출한 소니와 3파전이 벌어질 경우 보다 큰 출혈이 예상되기 때문에 한 단계 건너뛰고 세가와 소니의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추측설이 나돌기도 했다. 

[닌텐도64]
이미지 – 유투브(watch?v=8gVB-KWA0zE)

이것은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순욱의 병법인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 : 두 호랑이가 싸우게하는 계책)와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 : 호랑이가 이리를 잡아먹게 하는 계책)처럼 살아 남은 하나를 다시 경쟁상대로 두어 격파하려던 속셈이 아닐까 싶다. 두 호랑이가 싸우면 한 마리는 반드시 다친다는 양호상투(兩虎相鬪) 필유일상(必有一傷)의 뜻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닌텐도는 그 당시 제법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소니의 힘을 초반에 제압하지 않은 것이 나중에 큰 화가 되었다(물론 소니에게는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닌텐도 역시 새로운 차세대 게임기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소니와의 합작 프로젝트였고, 결과적으로 롬 카트리지의 독점 라이선스를 요구하던 닌텐도와 차세대 저장 매체인 CD-ROM 소프트웨어의 라이선스를 요구하던 소니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그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소니가 주도하던 이 프로젝트에서 닌텐도의 배신으로 소니는 두고두고 닌텐도에게 이를 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소니의 편을 들어주려고 그랬는지 그렇게 닌텐도가 주춤하고 세가가 방심하고 있던 틈을 노린 소니는 조용히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닌텐도가 각축전에서 미리 진을 빼버리면서 강대세력의 적극적인 방해가 사라지고,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고 닌텐도 없는 게임기 시장에 세가의 나 홀로 산등성이 진을 치는 기세 등등한 시기였다. 그 때에 소니의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선언은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기까지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얘기였다. 한낱(?) 가전제품이나 만들던 곱상한 문관이 십 수년을 피터지게 싸우는 전장에 뛰어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들이 보기에는 가소로워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SONY - PlayStaion]
이미지 - 유투브(/watch?v=6aXFNtEm7Hc)

그래서 신흥세력이자 무경험자였던 소니는 자신들의 제품에 기술력으로 승부해 보이겠다는 자신만만해 하는 자만심을 보이기보다는 함께 맞서 싸워 줄 아군 세력을 규합하는데 더 힘을 썼다. 그리고 당장 눈 앞에 싸워야 할 상대인 세가의 세가새턴이 초기에는 2D에 막강한 기능을 자랑하는 2D전용 게임기였던 것을 노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워크스테이션에서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막강한 기능을 자랑하는데 그 중에서도 3D기능이 탁월함을 홍보하는데 주력했다. 

이에 놀란 세가 측에서 초기의 2D전용 머신에서 3D 기능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전면적인 제품 설계 수정을 하게 되었다. 무리하게 급조하다 보니 결국 CPU 한 개로 처리하기 힘든 상황까지 치닫게 되자 CPU 2개의 듀얼 프로세서라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로 인해 후에 후속기종이 출시되어도 하위호환을 장담하지 못하는 호환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는 자승자박의 결과가 되었다.  

[세가 새턴
이미지 - 유투브(watch?v=-ytJS8QhVwI)

이러한 뼈아픈 대참사의 원인은 소니의 과대광고에 가까운 기만전술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세가의 내부적인 문제도 있었다. 애초에 가정용 사업부와 아케이드 사업부가 나뉘어진 게임기 사업이 문제였다. 세가의 가정용 사업부는 ‘닌텐도의 슈퍼 패미컴보다는 성능면에서 우월하지만 롬 카트리지를 쓰기 보다는 고용량을 지원하는 차세대 CD-ROM을 지원하는 2D 게임기’를 목표로 정했다.

하지만 소니의 정면도전에 놀란 아케이드 사업부에서 새롭게 3D 기능을 추가하여 전면적인 수정을 요청했다. 결국 억지로 설계가 변경된 세가 새턴은 결국 빈약한 3D 기능으로 게임 시장이 점차 2D에서 3D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당시 서드파티를 확보하기 위한 소니의 눈물겨운 노력은 결국 하늘에 닿아 스퀘어를 내려주셨다. 스퀘어는 일본에서 전국민 RPG로 추앙받는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를 만든 존재였다. 닌텐도와 혈맹에 가까운 우호관계를 지니며 ‘파이날판타지’ 1, 2, 3를 닌텐도의 패미컴으로 발매하고 ‘파이날판타지’ 4, 5, 6편은 닌텐도의 슈퍼 패미컴으로 발매하는 등 닌텐도와 스퀘어는 피를 나누지만 않았지 거의 형제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결국 피를 나누지 않은 게 문제였다. 스퀘어는 다음 시리즈인 7편을 기획하면서 3D의 막강한 잠재력에 주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파이날판타지 7’ 이야기는 꼭 3D여야만 했다. 하지만 형제라 생각했던 닌텐도는 자신들의 돈 주머니나 다름 없었던 롬 카트리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롬 카트리지는 아무리 기술개발을 한다 해도 최신의 대용량을 저장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형적으로 커진 대형 롬 카트리지나 그에 따른 메모리 칩의 막대한 패키지 비용이 필요했다. 게다가 닌텐도는 차기 출시작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스퀘어는 자신들의 새로운 작품을 출시할 플랫폼이 필요했다.

[Final Fantasy VII – 차세대 게임기 전쟁 New Game?]
이미지 – 유투브(/watch?v=KhSicdniIng)

이미 개발 중이었던 ‘파이날판타지 6’는 닌텐도의 슈퍼패미컴으로 출시했지만 다음 차기작이 문제였다. 슈퍼패미컴으로는 팩이 10개가 되어도 모자랄 지경이었고 하나의 게임을 팩 10개로 출시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남은 대안은 오로지 CD-ROM뿐이었다. 소니에게 이 기회는 천군만마 수준이 아니라 절대신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스퀘어의 ‘파이날판타지 7’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전격 출시되었다. 

이후 세가는 세가새턴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한 번 드림 캐스트로 역전의 기회를 노려보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고 가전제품 업체라고 무시했던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앞에 백기를 들고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해 버렸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결국 돌고 돌아 최근에 다시 닌텐도의 스위치 게임기로 ‘파이날판타지 7’이 나올 예정이라는 것이다(역시 세상은 돌고 돌아..)

[SONY - PlayStaion]
이미지 – 유투브(/watch?v=88ACUOvfDEw)

소니의 기념비적인 콘솔 게임기 시장 진출의 선봉장을 맡은 PS1(플스 1) 클래식 모델이 25년 만에 손 안에 들어오는 미니 사이즈로 새롭게 출시된다고 한다. 다음 편에서는 본격적인 소니의 콘솔 게임기 시장 진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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