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소프트문화재단, 1년 6개월 산고 끝 게임사전 출간 발표

“나는 딜러(dealer)가 될거야.”

“올 때 로밍(roaming)은 피해서 와라.”

“버스(bus) 태워주실 분 계신가요?”

게임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면서, 게임용어가 세대를 갈라놓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재성 엔씨소프트문화재단 전무에 따르면 딜러라는 말에서 ‘카지노’를 연상하면 기성세대, ‘공격수’를 떠올리면 젊은세대다. 마찬가지로 로밍에서 ‘통신서비스’를 연상하면 기성세대, ‘순찰중인 몬스터’를 떠올리면 젊은세대다. 버스는 ‘대중교통수단’ 외에도 ‘능력이 좋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도와주는 행동’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같은 단어지만 세대가 다르면 대화는 종종 안드로메다로 흘러간다.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나이 차이가 큰 경우는 더 심하다. 이 전무는 “지지(GG), 랙, 레이드, 강화, 던전, 롤백, 루팅 등 자주 쓰이는 게임단어 20개를 가족에게 보여줬더니 중학생 아들은 20개를 전부 맞힌 반면 아내는 단 1개만 맞혔다”고 말했다. 게임세대와 비게임세대의 의사소통은 나날이 험난해지고 있다.

엔씨소프트문화재단은 28일 이화여자대학교 SK텔레콤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게임사전: 게임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하 게임사전)’ 출간을 알렸다. 총 1년 6개월의 제작기간이 걸린 이번 사전은 한국 게임산업 및 게임문화에서 사용하는 방대한 어휘와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 최초의 게임사전이다. 엔씨소프트문화재단이 편찬을 담당하고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가 집필을 담당했으며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감수를 맡았다.

엔씨소프트문화재단에 따르면 게임사전이 출간된 것은 전세계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이재성 전무는 “한국 최초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국 아마존이나 일본 라쿠텐북에서 키워드 검색을 해 본 결과 판매중인 게임사전은 없었다”고 말했다.

게임사전 집필진은 최근 5년간 게임 커뮤니티에서 사용됐던 언어를 분석하고, 2188개 표제어를 엄선하여 1304페이지의 책에 담았다. 뒷부분에는 1950년부터 2010년대까지의 대표 게임들을 수록했다. 다만 인물은 선정 기준 논란을 우려하여 넣지 않았다.

▲이재성 엔씨소프트문화재단 전무

‘오버워치’, 냉정하게 보면 사전에 올라갈 정도 아니다

집필진이 게임사전에서 가장 큰 논란을 예상했던 부분은 시대별로 선정한 대표 게임이다. 지면이 한정된 탓에 인기 게임 상당수를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책임 집필을 한혜원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부교수는 “게이머들은 자신이 즐겼던 게임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게임이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반발할 수밖에 없다”면서 “(반발을 줄이기 위해) 데이터를 선정기준 1순위로 놓는 등 가급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 부교수와 함께 책임 집필을 맡은 이인화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는 “게임산업은 엄청나게 커다란 산업이고, 게임 관련 저술들이 한달에 16개씩 쏟아지는 마당에 사전을 아무리 두껍게 만든다고 해도 다 담을 수는 없다”며 “(독자 입장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임이 수록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사전에 수록되지 않을 수 있는 게임의 대표적인 사례로 블리자드의 신작 FPS게임 ‘오버워치’를 꼽았다. 그는 “오버워치가 훌륭한 게임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냉정하게 작품성을 판단했을 때는 사전에 올라갈 정도는 아니다”라며 “10년, 20년을 지켜봤을 때 사전에 올라갈만큼 작품성을 갖춘 게임들을 엄선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말은 기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2014년 출시된 FPS게임 ‘타이탄폴’은 게임사전에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 “오버워치는 안되고 타이탄폴은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질문에 이 교수는 “사실 오버워치가 출시되기 전에 사전 편찬이 완료됐다”며 “아깝게 떨어진 게임들이 많다”고 답했다.

▲이인화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 겸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장

차고에서 서버 돌리는 ‘바람의나라’, 분량 적은 것 당연해

게임별로 분량이 다르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됐다. 예를 들어 엔씨소프트의 ‘리니지’는 4페이지 이상에 걸쳐 자세하게 기술한 반면, 넥슨의 ‘바람의나라’ 설명은 2페이지에 그쳤다. 일각에서는 “엔씨소프트와 넥슨의 불편한 사이가 사전 편찬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이인화 교수는 “절대로 사이가 안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며 “엔씨소프트문화재단이 사전 편찬을 후원한 것은 맞지만,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대부분 넥슨에서 일한다. 최대한 공평하게 내용을 다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현재 게임의 인기가 분량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바람의나라는 차고에서 서버를 돌리는 수준으로 규모가 감소했으며, 유저가 1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도 몇십만명이 즐기는 리니지와 같은 선상에서 놓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젤다의전설’의 분량이 적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교수는 “게임사전은 최근 5년간 게시판에서 언급된 데이터를 기준으로 만들었다”며 “수십만건의 데이터를 자랑하는 다른 게임에 비해, '젤다의전설' 관련 데이터는 3만건에 그쳤다”고 말했다. 그는 “젤다의전설 이후에 태어난 게이머들이 많다보니까 그런 것 같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집필진 60여명 모두가 여성, 남성 시각은 다음 기회에

게임사전에 참여한 60여명의 집필진은 이인화 교수를 제외하고 모두 이화여대 석박사 출신의 여성이다. 이 때문에 게임 실수요자층이 대부분 남성인만큼 남성 시각을 더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불거졌다.

한혜원 부교수는 “왜 이화여대에서 게임사전을 맡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는 여성 게임기획자와 여성 개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라며 “우리 입장에서는 원래 하던 일을 잘 알리고 싶은 마음에 더 열심히 작업했다”고 말했다.

이인화 교수는 “게이머들 90%는 남자지만 게임을 연구하는 사람들 90%는 여성”이라며 “매달 쏟아지는 연구를 따라갈만큼 꼼꼼한 것은 역시 여성들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자들이 게임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집필진 비율을) 5대5로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덧붙였다.

이재성 전무는 “사실 사전 집필을 의뢰했을 때는 전원이 여성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다음 개정판에는 (남성 집필진을 추가하는 것을) 반영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게임사전은 출판물로만 제작되었으며, 웹에서 볼 수 있는 전자사전은 제공하지 않는다. 이 전무는 “전자사전이 실용적인 것은 맞지만, 텍스트북 형태로 먼저 접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며 “나중에 전자사전도 고려해보겠다”고 말했다. 현재 게임사전은 예약판매에 돌입했으며, 예약 건수는 총 160건이다. 가격은 6만8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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