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반갑고 씁쓸한' 세계최초 게임사전 출간을 바라보며

 

아마존 베스트셀러 ‘바른마음’의 저자인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인간은 이성적 사고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순서는 반대로 작용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감정이 먼저고, 이성은 그 감정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도덕적 판단을 내린 사람들은 연구 자료나 신문 기사 등을 통해 자신의 믿음에 대한 증거를 얻는다. 일단 증거를 확보하면, 더 이상의 이성적 사고를 멈춘다. 흥미로운 것은 사고를 멈춘 뒤의 행동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파나 신념을 뒷받침하는 주장은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확신을 무너뜨리는 정보는 온힘을 다해 거부한다. 정치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화가 늘 힘든 이유다.

한국 문화콘텐츠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시각이 갈리는 분야는 게임이다. 누군가에게는 생계수단, 누군가에게는 종합예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탄이 만들어낸 마약일 뿐이다. 일단 도덕적 결론을 먼저 내렸으니 게임이 유해한가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1999년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에서는 FPS 게임 ‘둠’이 제물로 바쳐졌다. 그 유명한 ‘짐승뇌 이론’도 믿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래서 게임을 두고 나누는 토론은 종교의 충돌과 맞먹는다. “토론하다 ‘저는 게임은 잘 모르지만…’이라고 한 뒤, 게임이 유해하다 주장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가장 답답합니다. 아니, 모르면 말을 말아야죠.” 엔씨소프트문화재단의 이재성 전무의 말이다. 하나의 콘텐츠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전문가 수준으로 알 필요는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이 권력을 갖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남는 것은 중세시대를 방불케 하는 마녀사냥이다.

정부는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셧다운제를 통과시켰고, 중독법 논란으로 게임을 마약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놨다. 그해 한국은 지스타에 모인 전 세계 게임 개발자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수십억원의 혈세를 투입해 게임중독의 학술적 근거를 찾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저는 게임은 잘 모르지만…’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법안을 발의하고 규제를 만들어 산업을 뒤흔든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 등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들이 대규모 출판운동을 벌였다. 사전을 통해 근대적인 지식과 사고법을 익혀 권위와 미신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비슷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엔씨소프트문화재단과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는 2016년 출판을 목표로 ‘게임사전’을 만드는 중이다.

게임사전은 말 그대로 게임에서 쓰이는 용어와 개념을 정리한 책이다. 사전이 출간되면 한국은 세계 최초로 게임사전을 선보인 나라가 된다. 한가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게임에 대한 편견, 혹은 무지의 산물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게임사전에 참여 중인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의 이인화 교수는 “출간이 완료되면 게임사전을 모든 국회의원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겠다”고 말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학자는 어느새 18세기 계몽사상가로 변신해 있었다.

모든 규제를 없애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유해한가, 규제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분석과 토론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면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게임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에서 합리적인 대화가 오갔던 적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전 한 권으로 게임에 대한 모든 편견을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사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들도 생겨날 것이다. 다만 게임을 두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 정도는 공유할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그래서 게임사전의 소식은 한 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씁쓸하다. 어쩌다 사전이라도 한 권 있어야 대화가 되는 시대가 됐는지. 뭐든 일단 내뱉고 우기다 나몰라하면 끝나는 시대가 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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