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프로즈를 퇴사한 시드마이어가 만든 우주게임, ‘알파 센타우리’

[Sid Meier's Gettysburg]
이미지 – 유투브(/watch?v=PgXpH80hK0M&t=237s)

‘문명2’는 출시하자 마자 각종 언론매체에서 연일 최고 점수 기록을 달성하며 판매 기록 행진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나갔다. 이렇게 대단한 게임을 만들고 나서 시드마이어가 제일 처음 한 일은 회사에 급여인상을 제안했다던가 직책을 달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정 반대로 사직서를 제출하는 일이었다. 다만 시드마이어는 일반적인 고용관계의 직원이 아니라 마이크로프로즈의 공동 창업주이자 최대주주 신분이었던 관계로 정산 절차가 간소하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회사에서는 시드마이어의 사직서를 수리했고 시드마이어는 공들여 키운 회사를 떠나야 했다. 미련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자신의 미련 때문에 남은 팀원들의 미래까지 저당 잡아 답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의 회사에서는 더 이상 시드마이어에게 개발자로서의 직무를 원하지 않았고 관리자로서 경영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실행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회사에서 바라고 있는 사업 내용을 수행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드마이어에게 더 이상 직급이나 직책의 타이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문명2’ 게임을 개발하는 내내 개발업무에 깊숙이 관여하지 못하고 주위에서 겉도는 느낌으로 경영일선에 참여하라는 강제적 지위에 지쳐갈 때쯤, 드디어 게임이 출시됐다. 자신의 책무를 다 했다고 느낀 시드마이어는 겸허한 마음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팀원들을 이끌고 군사 전문 게임 개발업체를 탈출했다.

마이크로프로즈와 스펙트럼홀로바이트를 나와서 만든 회사는 파이락시스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파이락시스라는 이름은 Fire(불)과 Axis(중심, 축)이라는 말을 합쳐진 뜻으로 불이 회오리치는 모양과 그 중심을 표현한 로고 모양도 불이 회오리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아마도 자신들의 의지대로 게임을 만들지 못하는 환경에 대항하는 의지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시드마이어가 새로운 회사인 파이락시스를 창업할 때 세운 원칙은 자신(시드마이어)은 오로지 게임 개발에만 관여한다라는 매우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원칙이었다. 이전 회사에서 함께 게임개발을 하던 제프 브릭스(Jeff Briggs)가 그 부분을 맡기로 했다. 제프 브릭스는 2004년 유력 경제 잡지에서 선출한 ‘올해의 CEO’ 후보에도 거론됐을 만큼 뛰어난 경영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제 시드마이어는 자신의 처음 바람대로 회사 내에서 게임 개발 일에만 몰두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파이락시스에서 처음으로 만든 게임은 ‘시드 마이어의 게티스버그’라는 게임이다. ‘문명’에 대한 판권이 이전 회사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게임개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출시하자 마자 게임 잡지와 평가 매체로부터 최고의 전쟁 게임으로 선정되는 등 그 해 최고의 게임이 되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게티스버그에서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 시절 가장 치열했던 전투지역 중 하나였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미국 본토에서 치러진 유일무이한 전쟁이었던 남북전쟁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을 장식한 전투이기도 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게임 개발 이전에 미국의 중요한 역사적인 소재로 이미 많은 영화나 드라마 등의 소재가 되기도 했었을 만큼 미국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소재였다. 문제는 이것이 미국인에게만 친숙한 소재라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유럽 사람들에게 한국의 역사 중 ‘황산벌 전투’를 아무리 귀가 따갑게 설명하고 전달한다 해도 한국인이 느끼는 감정과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지나치게 미국적인 소재를 선택한 것이 전 세계적인 흥행을 일으킨 ‘문명’ 게임과 대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이 부분을 간과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다음 소재는 지나치게 미국적인 것을 버리기로 했다. 정확히는 ‘미국’을 버리자라고 한 것이 아니라 특정 국가의 깊숙한 역사 한 토막만을 꺼내오는 것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자신들의 역사를 소재로 한 게임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언제나 가슴 한 켠에는 문명이라는 게임에 대한 아쉬움이 가슴 속 깊이 사무쳤다.

[Sid Meier's Alpha Centauri]
이미지 – 유투브(/watch?v=xer3BJ1xyIE)

그래서 다음 게임은 특정 국가의 역사를 소재로 하지 않고 반대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자신들이 만든 ‘문명’이라는 게임 보다 더 굉장한 게임을 만들어 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가상의 미래 세계를 소재로 하는 우주적 스케일의 게임 ‘Sid Meier's Alpha Centauri(시드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라는 게임을 만들었다.

알파 센타우리(Alpha Centauri, α Centauri)는 지구에서 41조 3,433억 Km나 떨어져있다. 이 광대한 거리는 지구에 사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끝없이 먼 거리이기 때문에 살아 생전에 도달할 수 없는 거리이지만, 드넓은 우주적 관점에서는 굉장히 가까운 거리다. 아마도 ‘문명’ 개발팀은, 아니 시드마이어는 알파 센터우리처럼 인간적 관점에서 문명이라는 게임에서는 멀어졌지만 자신들이 소재로 삼은 우주적 관점에서는 굉장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구에서 보면 하나의 별처럼 보이지만 천체 망원경으로 보면 두 개의 별을 확인할 수 있다. 알파 센타우리는 두 개의 항성이 공통적인 질량 중심을 가지고 공전하는 쌍성계(태양이 두 개) 중에 하나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이 하나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SF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의 어느 행성 중 태양이 두 개 혹은 그 이상 떠 있는 장면을 자주 봤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처럼 보이지만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별처럼 ‘문명’과 ‘알파 센타우리’ 게임의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Sid Meier's Civilization]
이미지 – 유투브(/watch?v=Idmh8hTVp4Q)

게임의 주제를 알파 센타우리로 정한 것은 ‘문명2’ 게임을 정통으로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은 신념의 표출이었다. ‘문명’ 게임에서 우주모드로 진입하게 되면 스토리상 우주선을 개발해 알파 센터우리로 우주탐사가 시작된다. 이에 착안해 ‘문명2’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진출의 염원을 담고 ‘알파 센타우리’라는 게임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파 센타우리’라는 게임 이름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현재 처해있는 입장을 대변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이 게임은 상당히 무게 있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게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지구에서 발사 된 우주탐사선이 4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하게 되고, 도착하기 사흘을 앞둔 시점에서 거대한 혜성과 충돌해 우주선의 탑승 인원 중 4분의 1이 희생당한다는 암울한 이야기로 게임이 시작된다.

게다가 우주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 유지 장치에 이상이 생기는 등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스파르탄 연방이라는 집단이 등장해 우주선을 무력 탈취하려 한다. 이 와중에 총 책임자였던 갈란드 선장이 암살당하는 비운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어수선한 사고현장을 장악하지 못한 지도세력에게 대항하듯이 다양한 집단이 생겨나게 되고, 그렇게 각각의 목표에 따라 제각기 서로 다른 탈출 포드(비상 탈출 우주선)에 탑승해 비상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는 스토리로 시작한다. 여기서 탈출 목표로 등장하는 행성이 ‘카이론’이라는 행성이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진행되는 스토리에서 알파 센타우리까지 우주선으로 40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설정은 아무렇게나 생각해낸 수치가 아니라 꽤나 과학적인 근거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핵 추진 엔진을 사용하면 이론적으로 광속의 12%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전제에 기반해 산출된 수치다. 지구에서 알파 센타우리까지의 실제 거리를 광년 단위로 환산하면 약 4.37광년 떨어져 있으므로 ‘4.37 / 0.12(광속의 12% 속도) = 36.416666..’년으로 계산 된다. 하지만 속도에는 즉시 속도 개념이 아닌 가감속의 증가율에 따라 필요시간이 더해지므로 약 40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설정은 꽤나 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하는 설정이었던 것이다.

[알파 센터우리 20년 도달 계획]
이미지 – 유투브(/watch?v=Gt1mHYNA0-0)

현실 세계에서는 그조차도 오랜 시간이라 생각했는지 스티븐 호킹 박사 팀은 그 시간을 단축시켜 20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계획을 구상 중이다. 한 때 이론상이긴 하지만 빛의 속도(광속)의 12%의 속도까지 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 항성간 탐사 계획이 수립되고, 1970년대만 해도 오리온 계획이나 다이달로스 계획 등 핵 추진 방식이나 핵융합 반응의 우주 탐사선 계획들이 있었지만 핵확산금지조약과 핵을 이용한 우주탐사가 금지되어 모든 탐사계획이 취소됐다.

최근 SF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행성간 항속시 사용하는 추진력체는 태양풍을 추진력으로 이용하는 태양 돛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우주 탐사 연구 개발보다는 영화적 소재로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 우주선에 거대한 태양전지판 같은 돛이 펼쳐지다가 어딘가에 걸려 제대로 펼쳐지지 않아 우주선에 필요한 전력과 에너지에 문제가 생긴다던가, 갑자기 불어오는 돌풍 같은 현상에 돛이 찢어진다거나 우주를 떠돌던 물체에 맞아 파손된다던가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돛을 수리 하러 우주선 외부에 나가서 작업하던 중에 겪는 사고를 통해 극중 긴장감을 연출하는 소재로 자주 쓰인다.

시드마이어는 알파 센타우리 게임을 개발하면서 이미 20년전에 우주적 관점에서 실제로 벌어질 것 같은 현상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게임이라 할지라도 오프닝 스토리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또 하나의 명작 게임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알파 센타우리라는 게임은 보통의 SF를 소재로 하는 다른 게임들처럼 개연성 없는 환상의 허구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연구됐고 실제화하려고 준비 중이던 사례들과 입증 된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이다.

[Sid Meier's Alpha Centauri]
이미지 – 유투브(/watch?v=xer3BJ1xyIE)

알파 센타우리 게임 개발팀은 이렇게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최대한 현실성 있는 내용을 게임에서 구현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우주적 관점의 역사 게임은 개발하기 쉽지 않았다. 그들의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일어났던 일에 스토리를 더해서 가상의 또 다른 역사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시스템이 필요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력만으로 기획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알파 센타우리라는 게임은 단순히 SF적인 과학기술을 소재로만 하는 게임이 아니었고 그 안에 중심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그래서 철학이나 윤리, 종교와 사회학 그리고 자연생태나 환경 등 인간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관통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기 때문에 개발팀의 고민은 더해갔다. 그렇게 개발된 알파 센타우리 게임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SF나 우주적 존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게임은 자신들의 지식 범위를 넘어서는 방대한 분량과 그에 대한 철저한 고증으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우주적 관점에 대한 지식이나 흥미가 없던 사람들에게도 게임적인 재미요소는 이미 문명 시리즈를 통해 검증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알파 센타우리라는 게임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알파 센타우리도 엄밀히 말하면 ‘문명’이 아니었다. 문명 게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만든 게임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아무리 뛰어난 게임을 만들더라도 늘 시드마이어에게 따라 붙는 문명 게임의 개발자라는 타이틀이 그를 괴롭혔다. 그렇게 게티스버그와 알파 센타우리 게임을 만드는 동안에도 문명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랠 길 없던 시드마이어에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2001년 인포그램즈가 해즈브로 인터랙티브를 사들인 것이다.

인포그램즈는 아타리의 게임판권과 마이크로프로즈와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의 게임 판권 그리고 해즈브로가 유통했던 게임들의 판권까지 죄다 싹슬이 하면서 문명과 롤러코스트 타이쿤의 판권까지 가져가게 된다. 자신이 공들여 키운 회사와 게임이 여기저기 팔려나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시드마이어에게 인포그램즈가 손을 내민것이다. 자신들이 새로 사들인 게임 판권 중에 가장 쓸만하다고 여겼던 것 중에 하나가 ‘문명’ 시리즈였고 이것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원래 만들던 사람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미 세상에는 ‘문명’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시드마이어의 문명’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고 시드마이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오래전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만들고 싶어했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문명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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