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식음을 전폐하게 만든 폐인 게임 ‘문명’의 불씨

[문명(1991)]
이미지 – 유투브(/watch?v=N498kSz1Hb8)

지난 편에 아타리와 인포그램즈, 해즈브로, 마이크로프로즈 그리고 스펙트럼 홀로바이트 등 복잡하고어지러운 회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 회사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문명이라는 게임과 관련이 있던 회사들이라는 점이다. 문명 게임은 정확히는 ‘시드마이어의 문명’ 이라는 이름으로 게임 이름(문명-Civilization)보다 개발자(시드마이어-Sid Meier)의 이름이 앞에 붙는 게임으로도 유명하다.

문명 게임의 시작은 마이크로프로즈라는 회사에서 시작됐다. 마이크로프로즈는 F-15나 F/A117A 등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유명한 회사다. 문명 시리즈를 만든 시드 마이어와 함께 마이크로프로즈의 공동 설립자였던 빌 스탤리는 공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회사의 방향성은 명확히 제시할 수 있었다. 1982년 회사를 설립하자마자 만든 게임이 ‘Spitfire Ace(스핏파이어 에이스, 1982)’라는 전투기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이었고, 그 이후로도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주로 개발했다. 그러다가 점차 범위를 확대하여 다양한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군사적인 전투’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1985년 출시한 ‘사일런트 서비스’와 같은 게임도 공중을 휘젓고 다니는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라 캄캄한 해저 깊은 곳을 떠도는 잠수함 시뮬레이션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군사’의 범위 안에 있었다. 1986년 출시한 ‘건쉽(Gunship)’은 후에 ‘건쉽2000’게임의 모태가 되었는데 이 또한 공격 헬리콥터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군사(밀리터리)’ 범위 안에 있는 게임이었지만 정작 시드 마이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은 아니었다고 한다.

[마이크로프로즈]
이미지 – 유투브(/watch?v=ths0tQL2qu4)

마이크로프로즈는 로고 화면에도 보이듯이 ‘SIMULATION’게임에 중점을 둔 밀리터리 게임 전문 개발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회사였다. 그러던 중 1987년 출시한 ‘해적’ 게임은 시드 마이어가 회사에 제안한 게임 중 가장 모호하고 애매한 분야의 게임이었기에 제안서를 받아 본 경영진들은 술렁거렸다. 군사 게임이라고 하기에 애매하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뭐한 요상한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해적이라는 게임은 경영진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예 전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통 밀리터리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 같으면서도 못내 아쉬운 게임이었다. 하지만, 회사의 공동 설립자였던 시드 마이어의 제안을 무작정 거절 할 수도 없었다. 빌 스탤리 또한 시드 마이어 없이는 게임 개발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최대한 협조하면서 밀어주는 모양새는 보여주어야 했다.

[Sid Meier's Pirates!]
이미지 – 유투브(/watch?v=7ABDJIUoM5k)

그래서 회사는 어른스럽게 조금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바로 게임 이름 앞에 개발자의 이름을 붙이자는 아이디어였다. 겉으로 내세운 명목은 유명 개발자의 이름을 게임에 붙이면 판매에도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속내는 만에 하나라도 망하게 되면 마이크로프로즈라는 회사 이름보다 시드 마이어라는 개인에게 덧씌울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드 마이어도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게임 타이틀에 붙인다는 조건에 대해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직 그렇게까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기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회사 역시 강력한 조건제시에 타협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게임 출시에 대한 회사의 지원을 받으려면 타협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결국, ‘해적’이라는 게임은 ‘시드 마이어의 해적’이라는 타이틀 달고 출시가 됐고 회사의 경영진에게도 시드 마이어 개인, 양자 모두에게 다행스럽게도 흥행에 성공한 게임이 되었다. 필자가 어린 시절 밤을 새며 즐기던 코에이(KOEI)의 ‘대항해시대’도 시드 마이어의 해적이라는 게임을 보고 염감을 얻어 만든 게임이었으니, 해적이라는 게임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당시에 ‘시드 마이어의 해적’이라는 게임을 보고 ‘시드 마이어’라는 개발자 이름을 잘 몰랐던 사람들은 시드 마이어가 무슨 해적의 선장 이름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있었다(사실 지금도 게임을 하는 사람 중에 시드 마이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많다).

[Sid Meier's Railroad Tycoon]
이미지 – 유투브(/watch?v=ths0tQL2qu4)

이렇게 한 번 외도를 경험한 시드 마이어는 자신의 애초에 만들고 싶었던 게임이 무엇이었는지 본질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됐고, 마이크로프로즈가 전면에 내세웠던 정통 밀리터리 게임 개발 회사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시드 마이어는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목표를 달성하는 군사적인 활동에 대한 흥미보다는 이와 정 반대로 부서진 것들을 되살리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시드 마이어는 윌 라이트의 심시티라는 게임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기존에 게임이라는 것은 무언가 대상을 파괴하고 처치하면서 얻는 승리 포인트에 핵심 시스템이 맞춰져 있는 것에 반해, 심시티는 애초에 쳐부술 대상도 없었고 파괴시킬 목표물도 없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든다는 개념이 그에게는 그 동안의 게임 개발자로서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3대 게임 개발자라고 하면 문명 게임을 만든 ‘시드 마이어’와 심시티의 ‘윌 라이트’, 갓 게임의 대부로 알려진 ‘피터 몰리뉴’를 꼽는다. 거장끼리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지 시드 마이어는 윌 라이트의 게임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우습게도 심시티 게임 역시 개발 전에는 엄청난 질타와 비아냥을 받았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회사의 정책에 전면으로 위배되는 비군사적인 게임을 제안하게 되는데 그것이 ‘시드 마이어의 레일로드 타이쿤’이다. 안 그래도 이전에 해적 게임으로 경영진들과의 사이가 서먹서먹한데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전투’라는 개념조차 들어있지 않은 게임을 만들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해적 게임에는 전투라도 했었지 이건 뭐 땅 위에 기차가 돌아다니는 게임을 만든다고 하니 군사 게임 전문 업체인 마이크로프로즈의 위상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회사의 정체성 자체가 모호해질 판이었다. 악랄한 이단이라는 욕설과 폭언에도 굴하지 않고 시드 마이어는 자신의 게임 철학을 밀고 나갔다. 회사의 갖은 회유와 모집 핍박이 거세어질수록 반대로 시드 마이어의 열정은 더욱 더 불이 붙어 꺼질 줄을 몰랐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자!’,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자!’에 생각이 이르자 갈 길이 분명했고 목표가 명확해졌다.

그렇게 군사 전문 게임 개발업체인 마이크로프로즈에서 전혀 생뚱 맞게 철도,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 나오게 됐다. 빈 땅 위에 철도를 건설하고 열차를 운행하면서 승객과 물자를 운송한 돈으로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게임의 목표였다. 당연히 회사 내부에서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저 따위 게임을 누가 돈 내서 산 단 말인가 하는 탄식과 조롱만 넘쳐났다.

하지만 정작 게임이 출시되자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게임에 열광했다. ‘경영’이라는 핵심 키워드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많은 게임 유저들은 자신이 하고 싶거나 해보고 싶지만 현재 여건상 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대리만족을 게임을 통해 경험하고 즐거움을 느끼기는데, ‘경영’이라는 부분도 바로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챙기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언감생심 경영이라는 화두는 감히 입밖에 꺼내기도 민망할뿐더러, 자신에게 경영자로서의 책무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섣불리 도전하기에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레일로드 타이쿤이라는 게임은 그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경영’을 게임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Sid Meier's Railroad Tycoon]
이미지 – 유투브(/watch?v=ths0tQL2qu4)

철도라는 지극히 마니아들의 하드코어한 장르 역시도 경영의 대상이 철도 사업이었을 뿐이지, 경영의 본질은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굳이 철도가 아니어도 되었을 정도로 게임상에 표현 된 철도 사업의 본질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열차간의 궤도 시스템이라던가 운행 시스템, 열차의 속도 제어나 추월 등의 관리 제어 시스템이나 신호기 등 많은 부분들이 현실과는 달리 생략되고 축소되어 선(철도)만 깔면 열차는 자동으로 알아서 운행하기에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회사의 경영에만 신경 쓰면 됐다.

그렇게 시드 마이어의 레일로드 타이쿤(Sid Meier's Railroad Tycoon)은 이 땅의 수 많은 예비 창업가와 사업가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며 큰 재미를 선사하는 명작 게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게임의 개발자였던 시드 마이어는 게임 역사상 최초로 ‘타이쿤’이라는 단어를 게임에 쓰며 타이쿤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발돋움 하는데 기여한 공으로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여전히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성공적인 게임을 개발했어도 회사의 경영진들은 ‘그저 어쩌다 운 좋게 한 번 잘 된 게임’으로 규정짓고 추가 예산 지정이나 프로젝트의 확장 지원 등에 대해 냉담했다. 회사 내부의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적과 레일로드 타이쿤으로 연달아 성공한 시드 마이어는 이제 자신의 갈 길을 분명히 정했다. 누가 뭐래도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어야 성공한다는 확신이 가슴 속 깊이 자리잡았고 회사에서 주문하는 전쟁 군사 게임은 더 이상 개발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인류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 미시간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기도 했던 그였기에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맞는 내용을 게임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렇게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 불릴 정도로 너무 재미있어서 심각한 중독성으로 많은 이들의 식음을 전폐하게 만든 폐인 게임 ‘문명’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Sid Meier (1998)]
이미지 – 유투브(/watch?v=bQk_FxeXJOg)

시드 마이어는 인류사의 위대한 업적과 많은 이야기를 하나의 게임에 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역사를 전공했던 자신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기존에 단순히 ‘경영’에만 초점을 맞춘 정도의 난이도로는 이도 저도 아닌 어설픈 게임만 될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정치를 기본으로 경제와 군사, 그리고 전쟁과 무역, 외교, 역사와 종료, 철학과 문학, 예술 등 다양한 인류사 항목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분류할 것인지부터 넘어야 할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다행히 시드 마이어는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게임 개발의 묘를 체득한 전문 개발자였다. 아마 난생처음 개발한 게임이 문명이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듯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성공적인 게임 개발을 경험했던 그였기에 현실과 게임의 차이점에 대해 경계를 명확히 하고 있어야 할 것과 없애도 될 것들에 대한 분류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문명 게임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우선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할 핵심 키워드부터 정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시드 마이어의 4X 시스템’이다. 4X 시스템이란 ‘탐험(Explore)’, ‘영토확장(Expand)’, ‘개척(Exploit)’, ‘점령(Exterminate)’의 4가지 Ex가 게임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요소로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기존의 게임들이 단순히 탐험이라는 요소에 부가적인 기능을 제공한다거나 영토확장 등을 통해 점령을 끝으로 게임이 종료되는 것에 비해 이 모든 구성 요소를 순환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탐험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점령으로 끝나지도 않고 확장과 개척도 동시에 진행하며 도시나 국가 차원에서의 대업적인 경영에 초점을 맞추었다.

[Sid Meier's Civilization
이미지 – 유투브(/watch?v=DGf74lNsZgQ)

이 모든 계획을 설명했을 때 마이크로프로즈 경영진들의 반응은 ‘어이없음’이었다. 아니, 세상에 히스토리 다큐 채널에나 나올법한 지루하고 따분한 주제를 게임으로 만든다고? 누가 인류의 역사에 관심이나 있기나 한데? 그러니까 게임 안에서 주인공의 역할이 뭔데? 게이머는 저기서 뭘 한다는 건데? 뭘 조종해야 되는데? 등등 난데없는 인류 역사학 강의에 경영진들은 화부터 버럭 냈다.

그렇지 않아도 정통 밀리터리 게임 개발 업체로서 입지도 약해져 가고 새로운 라이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 해적 때도 그렇고 철도 게임도 그러더니만 뭐가 어째? 이제는 아예 인류사를 역사를 문명이라고 게임을 만든다고? 경영진들의 분노도 내실 이해가 가는 대목이지만 그 당시의 경영진들은 이미 규모가 비대해지고 방만하게 운영되던 회사를 냉정히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초반 성공에 도취했던 경영진들은 보다 냉정하고 회사의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었다.

결국 끈질긴 설득 끝에 마지막 기회를 부여 받아 ‘문명’ 게임 프로젝트에 착수했지만 회사에서의 지원은 총 책임 개발자 ‘시드 마이어’와 경영진들의 눈 밖에 난 레일로드 타이쿤을 함께 개발하던 ‘브루스 셸리(Bruce Campbell Shelley)’ 달랑 두 명뿐이었다. 이 당시 마이크로프로즈는 원래 자신들이 하고 있었고 제일 잘 하는 분야라고 자신하던 새로운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던 중이었다. 그 프로젝트에 시드 마이어를 지명했지만 더 이상 군사 게임은 만들지 않겠다며 자신만의 게임 개발을 제안한 시드 마이어가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브루스 셸리 한 명을 더 보태준 정도였다.

그렇게 인류의 위대한 자산으로 남길만한 명작 게임 문명의 전설은 회사의 지원도 없이 초라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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