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 소니와 합작 계약 돌연 파기…소니가 내린 결정은

[한 번 해보자 이거냐?]
이미지 - 유투브(/watch?v=QRg9QvJLHWs&feature=youtu.be)

1992년 6월 24일은 소니 최고경영진들의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동방의 작은 섬 나라의 한 기업에서 열리는 임원진 회의였지만, 그 회의의 결과는 전 세계 게임 산업의 역사를 새로 쓴 날로 기록됐다. 

이 날 회의의 주제는 동업자의 신의를 저버리고 숙적과 손을 잡은 배신자 닌텐도에 대한 소니의 대응방안과, 그 배신에 깊숙이 관여한 내부의 숙적 쿠다라기 켄의 거취였다. 사실 쿠다라기 켄은 닌텐도의 슈퍼패미컴에 자사의 음원칩을 탑재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자, 소니의 위상과 명예를 드높이는데 일조한 공적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거칠 것 없는 자유분방한 태도가 상급자들에게는 무례한 망나니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참에 처단하자는 속셈이었다.

당시 소니의 사장이었던 오가 노리오 사장 역시 이런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쿠다라기 켄 특유의 기민함과 통찰력을 높이 샀기에 번번이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일의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에다, 그 동안의 쿠다라기 켄 돌봐주기에 극도의 인내심의 한계에 달한 경영진들을 달랠 방도가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회의는 엄숙하게 시작됐다. 

쿠다라기 켄과 닌텐도의 관계는 이미 오래 전 패미컴 시절부터 시작됐는데, 닌텐도의 슈퍼패미컴에 소니의 사운드 칩 계약을 성사시키기 이전부터 쿠다라기 켄은 닌텐도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지난 편에 소개한 것과 같이 쿠다라기 켄은 자신의 딸이 패미컴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 미래산업은 게임산업이 중심이 될 것이라 직감하고 게임산업의 중심에 있는 닌텐도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1986년 2월 패미컴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이라는 추가 저장장치가 달린 패미컴 시스템을 출시했는데, 이것을 보고 쿠다라기 켄이 소니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라고 닌텐도 측에 제안한 것이 그와 닌텐도의 첫 만남이었다.

[패미컴 + 디스크 시스템]
이미지 - 유투브(/watch?v=I948WbPWuJ4)

결론적으로 이 제안은 닌텐도 측에서 검토의 여지도 없이 거부당했다. 그는 향후 개발할 콘솔 게임기에 소니의 저장장치 기술과 닌텐도의 게임기 설계 기술을 합쳐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자며 엄청난 열정을 보였지만 닌텐도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굳이 소니와 손 잡을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사의 기술이 유출될 것에 대한 부분도 신경써야 했을 것이다. 이 때 소니의 경영진은 게임 사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거대 글로벌 가전업체를 꿈꾸던 소니의 경영진들에게 게임기 사업은 한낱 어린애들 코 묻은 동전이나 갈취하는 그런 저급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쉽게 말해 폼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입사 초기부터 미움 받던 쿠다라기 켄에게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소니 경영진들의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미움이 커져갔다. 그렇게 첫 패미컴 관련 미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쿠다라기 켄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상사의 미움이야 아랑곳 않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더 미움이 더해졌다.

그런데도 쿠다라기 켄은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문제를 일으켰다. 닌텐도의 차기 게임기로 슈퍼패미컴으로 결정되자, 자신이 설계한 신형 음원칩을 소니에 알리지도 않고 공식적인 절차도 생략한 채 소니의 음원칩을 닌텐도에 공급하기로 해버린 것이다. 이 때는 경영진들도 참지 않았다. 노발대발해서 당장에 저 문제아 놈을 소니에서 내 쫓아 버려야 된다고 성토가 끊이질 않았다. 그 동안 소니의 이단아, 문제아라는 주위의 평가에도 묵묵히 쿠다라기 켄의 저력을 믿고 지원해 준 오가 노리오 사장도 궁지에 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슈퍼패미컴이 16비트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소니의 경영진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슈퍼패미컴의 시장확대에는 탁월한 그래픽처리와 월등한 사운드 음원 칩의 성능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알려지면서 그 월등한 사운드 음원칩이 사실은 소니의 기술이다라는 언론 보도에 잠시 화를 내려놓았다.

꼴 보기 싫은 놈이 일을 벌렸는데 어쩌다가 그게 대박이 났다, 그래서 벌을 내리고 싶어도 결과론적으로 공과(功過)를 따져보니 과(과실)보다는 공(공적)이 더 컸기에, 이번 사건은 넘어가기로 한다, 정도로 경영진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들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고 뒷방 늙은이 취급하며 자기 멋대로 소니의 이름으로 닌텐도에 공급계약을 진행한 것에 대한 죄는 경영진들의 마음 속에 남았다. 이미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사건에 대한 경고장과 이번 슈퍼패미컴 음원칩 사건에 대한 경고장으로 두 번의 경고장을 받은 셈이었다.

내부에서는 그에 대한 미움이 커져갔고 특히 경영진들은 눈엣가시처럼 정말 하루라도 빨리 그를 뽑아서 내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럼에도 어째 하는 짓마다 잘 풀려서 이를 갈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의 자유분방한 질주는 멈출 줄 몰랐다. 쿠다라기 켄은 다시 닌텐도를 찾아갔다. 만약 쿠다라기 켄의 딸이 패미컴이 아니라 세가의 게임기를 했다면 세가를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건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오가 노리오도 쿠다라기 켄도 닌텐도나 소니도 아닌 쿠다라기 켄의 딸이 아닐까?

닌텐도의 차세대 게임기 사업에 대한 구상을 알게 된 쿠다라기 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전에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이 출시됐을 때 소니의 저장장치 기술과 닌텐도의 게임기 설계기술을 합쳐 새로운 게임기를 개발하자던 제안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닌텐도를 들락날락했다. 얼마나 닌텐도를 찾아가 괴롭혀댔는지 이번에는 닌텐도의 경영진들이 난리가 났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렇게까지 찾아와서 난리를 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닌텐도는 전통적으로 롬 카트리지를 채택하고 그에 대한 라이선스를 주 수입원으로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기존의 것은 모두 버리고 새로운 저장매체인 CD-ROM을 탑재해야 한다고 방방 뛰는 쿠다라기 켄에게 닌텐도의 경영진은 난색을 표했다. 이제 쿠다라기 켄은 소니에서 뿐만 아니라 닌텐도에서까지 미친놈 소리를 듣게 됐다.

[우에무라 마사유키]
이미지 - https://warosu.org/vr/thread/5188271

여기서 닌텐도의 우에무라 마사유키가 나섰다. 당시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닌텐도 안에서도 권력의 핵심에 있는 주요 인물 중에 한 명이었다. 이미 1980년대 게임&워치 시리즈로 게임기 시장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진 닌텐도에는 닌텐도 개발정보부 1팀 팀장 요코이 군페이라는 걸출한 사내가 있었다. 한낱 종이 카드(화투, 트럼프 카드)나 만들고 코 흘리는 동네 애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이나 만들던 중소기업 닌텐도를 일약 전자게임기 회사로 거듭나게 하며 당당히 60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일으켜 세운 일등공신이었다. 

이 요코이 군페이가 휴대용 게임기를 만들 때 액정은 샤프전자와 협력하는 과정에서 눈 찍어 둔 사람이 있었다. 요코이 군페이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당시 닌텐도에 비해 대기업이었던 샤프전자에 사표를 내고 닌텐도로 이직한 인물이 바로 우에무라 마사유키다. 그리고 1981년 10월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조직내에서도 불 같은 성질을 감당하기 힘들어 야쿠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야마우치 사장의 부름을 받는다(참고로 이 아저씨는 직원들 노는 꼴은 절대 못 봐주는 아저씨다).

[ATARI 2600]
이미지 - https://www.mediamatic.net/en/page/61428/atari-2600-1977

당시 북미를 휩쓸고 있던 아타리2600에 큰 감명을 받은 야마우치 사장은 그에게 특명을 내린다. 1년의 기간을 줄 테니 “일본판 아타리2600 만들어 놔”라는 말과 함께 만약에 이 일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 할 경우 그 끔찍한 뒷일에 대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별명이 야쿠자..).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살고자 하는 욕망에 미친 듯이 전국을 휘젓고 다닌 끝에 ‘리코’라는 회사의 칩셋 생산설비를 찾아냈다. 그는 리코 2A03 1.79 MHz CPU를 프로젝트에 채택하기로 하면서 CPU와 PPU 한 세트당 생산 조건은 2000엔을 넘기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설계 변경을 즉시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리코에 제시했다. 리코는 그런 조건이라면 최소 약정으로 100만대 이상 주문량을 확보해 달라는 조건과 함께 양사의 계약은 성립됐다(2년간 300만대 추가 계약). 

야마우치 사장의 협박에 하루 18시간의 강행군을 하며 잠 못 이루던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하드웨어에 대한 틀이 잡혀가자 한 시름 놓았다. 문제는 게임기에서 돌아갈 소프트웨어였다. 여기서 채택된 것이 자사의 ‘동키콩’ 게임이었다. 당시 ‘동키콩’은 아케이드판으로 아케이드 센터(오락실)에 가면 오락실 기계로 즐기는 게임이었는데 이것을 일반 가정에서도 즐길 수 있게 만들자는 것이 목표였다.

[Donkey Kong 1981]
이미지 – 유투브(/watch?v=rYNMatF5hcU)

이 때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동키콩’을 개발하고 훗날 닌텐도를 상징하는 마리오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야모토 시게루와 긴밀한 협력관계가 이루어지면서 돈독한 사이가 됐다.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던 불가능해 보이던 일도 목숨을 걸고(?) 하다 보니 점점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다행히 리코의 칩 설계 연구원들도 ‘동키콩’을 좋아했다. 리코의 연구원들에게도 ‘동키콩을 집에서도 할 수 있게 해보자고?’는 게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1983년 7월 전설의 물건이 태어났다. 바로 ‘패밀리 컴퓨터’라는 뜻으로 줄여서 ‘패미컴’이라 부르는 닌텐도의 전설적인 게임기다. 초기의 제품 불량으로 반품 사태와 리콜 등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 이후는 알려진 바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가정용 콘솔 게임기가 되었다. 패미컴의 성공에 힘을 얻은 개발정보부 2팀은 새로운 도전 과제를 수행하게 되는데 패미컴 시절 맺은 인연으로 다시 리코의 CPU를 탑재한 슈퍼패미컴의 개발이다. 

이 때 소니의 음원칩 계약 공급과 관련하여 쿠다라기 켄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한 것이 우에무라 마사유키였다. 이미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패미컴과 슈퍼패미컴의 개발로 닌텐도 내에서의 입지도 야마우치 사장과 요코이 군페이 다음으로 위세를 떨치는 최고 권력자 중에 한 명이었다. 이 당시의 우에무라 마사유키한테는 미야모토 시게루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우에무라 마사유키가 입을 열었다.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전통적인 엔지니어 출신이었고 그가 했던 일들은 모두 기존의 없던 것들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좌)쿠다라기 켄 / (우)우에무라 마사유키]
이미지 - https://japaneseclass.jp/trends/about/%E4%B8%8A%E6%9D%91%E9%9B%85%E4%B9%8B

그런 그의 성향에 따라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은 높을 수 밖에 없었고 쿠다라기 켄의 CD-ROM 탑재 제안은 그의 기술적인 호기심과 욕망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이미 슈퍼패미컴 시절 독자적인 음원칩을 설계하여 그 성능을 입증한 바 있는 쿠다라기 켄에 대한 신임도 더해졌다. 

닌텐도에서 쿠다라기 켄에 대한 평가는 속된 말로 ‘미친놈이지만 쓸만해’였다. 닌텐도의 경영진들 중에 반대를 외치던 이들은 앞에 붙어 있는 ‘미친놈’에 대한 우려를 표했지만,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그 뒤에 ‘쓸만해’라는 평가에 대한 설득과 주장으로 소니와의 합작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렇게 닌텐도의 우에무라 마사유키와 소니의 쿠다라기 켄에 의해 1989년 1월 소니의 오가 노리오 사장과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만나 차세대 게임기 사업에 대한 계약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닌텐도의 슈퍼패미컴에 소니의 CD-ROM 기술을 합쳐 슈퍼패미컴 애드온 프로젝를 ‘플레이스테이션-X(PS-X)’ 사업은 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Console Wars: Sega, Nintendo, and the Battle that Defined a Generation]

하지만, 여기서 예상치도 않았던 복병이 등장하는데 저 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던 아라카와 미노루였다. 아리카와 미노루는 일찍이 불모지 미국에 건너가 닌텐도 아메리카를 설립해 이미 진출해 있던 세가에 맞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활약한 인물이다. NES라는 이름으로 닌텐도의 패미컴으로 북미 시장에서 세가 아메리카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전공을 세운 이야기는 실제 전쟁 이상으로 과열차고 치열했는지 ‘Console Wars’라는 책으로도 나와 있을 정도다. 

그 아라카와 미노루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것도 만사를 제쳐두고 황급하게 닌텐도의 회장을 찾아갔다. 아니 사위가 장인어른을 찾아갔다. “장인 어른 안 됩니다!”로 시작된 그의 열변은 차기 저장매체인 CD-ROM의 저작권을 소니가 쥐게 하면 닌텐도의 앞 날은 소니의 발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닌텐도로서는 그 이상 치욕적인 것이 없는 등 뒤에 칼이 꽂힌 것 같은 굴욕의 미래를 담고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부터 CD-ROM의 성장세를 눈여겨 보고 있던 아라카와 미노루에게 닌텐도의 암울한 미래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고 “처마 끝을 빌려주다 본가(집)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다”라는 사위의 말을 장인어른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장인 야마우치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아라카와 미노루]
이미지 – 유투브(watch?v=2oRQEY9VPUo)

그 동안 소니의 친목적인 행위와 자사의 고성능 음원칩을 제공하고 차세대 저장매체인 CD-ROM까지 기술 제휴를 통해 새로운 게임기 사업을 구상하자고 접근했던 모든 것들이 닌텐도의 목을 죄는 올가미 같은 것이었음을 깨달은 야마우치 회장은 두말 않고 바로 계약을 파기해 버렸다. 물론 완벽한 계약 파기는 법정공방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소니와 체결한 CD-ROM 개발건에 대한 계약은 파기 되지 않았지만, 닌텐도는 다른 규격(네덜란드 필립스의 CD-I) 역시 채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겠다는 애매한 말로 계약에 대한 파기를 넌지시 전했다. 

소니와 닌텐도의 계약 파기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아라카와 미노루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라카와 미노루는 닌텐도 아메리카 설립 초기에 잘못된 시장 수요 예측으로 레이더 스코프 게임기를 북미로 수출하는 일을 맡았다가, 악성 재고를 처분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실패로 야마우치 회장에게 거의 죽기 직전까지 욕을 들었다. 결국 미야모토 시게루가 재고로 쌓여있던 레이더 스코프를 ‘동키콩’이라는 게임으로 다시 만들어서 북미로 보내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고 ‘동키콩’은 북미에서 대박을 쳤다. 

닌텐도 아메리카는 설립한지 2년도 안 되어 ‘동키콩’ 하나로 연 1억 달러 매출을 기록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는데 이것은 아라카와 미노루의 공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미야모토 시게루의 공이었고, 그런 주변의 환경이 아라카와 미노루에게는 큰 짐으로 남아 있었다. 아무리 장인이라고는 해도 야마우치 사장은 절대 가족이라고 해서 봐주는 일이 없는 냉정하고 엄격한 양반이었다. 언제나 그의 마음 속에는 장인 어른에게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고 이번이 바로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닌텐도와 소니의 계약은 결국 파국의 길로 치닫게 되고 결국 1992년 6월 24일 소니의 최고경영진들의 회의가 열리게 됐다.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쿠다라기 켄이 살아 남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이미 여러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소니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그의 망나니 짓은 도저히 용서받기 어려운 중죄였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고 쿠다라기 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가 노리오 사장님이 직접 서명한 계약서를 닌텐도가 휴지로 만들었습니다. 천하의 소니가 닌텐도에게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겁니까?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그의 나즈막한 한 마디에 소니의 경영진들은 물론 가만히 듣고 있던 오가 노리오 사장 역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소니의 경영진들은 워크맨이라는 신 문물을 전 세계에 퍼트리고 소니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주역들이었다. 그들에게 소니는 인생의 전부였고 자랑이자 자존심이었다. 쿠다라기 켄의 과오나 실책을 비난하기 위한 자리에서 닌텐도의 배신 행위에 소니가 우습게 보인 것이 더 화가 난 것으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쿠타라기 켄의 말을 들으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결국 참지 못하고 오가 노리오 사장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진행하시오!” 

결국 이 날 회의는 처음 시작된 의도와 다르게 전혀 다른 엉뚱한 결론으로 끝이 났다. 소니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닌텐도와 16비트 게임기 따위로 경쟁하기보다는 닌텐도와는 차원이 다른 3D기능의 차세대 게임기로 정면 대결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책임질 사람은 쿠타라기 켄으로 지명되었다. 1992년 6월 24일 이제 쿠다라기 켄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게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과 닌텐도 아메리카의 지사장이자 그의 사위였던 아라카와 미노루, 그리고 소니의 사장이었던 오가 노리오와 닌텐도와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쿠다라키 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았던 닌텐도의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이렇게 각자의 이유와 목표를 가지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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