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첫 출시되어 리메이크 거듭한 장수 타이틀

아주 오래 전에 AFKN이라는 방송을 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어릴 적에 AFKN을 자주 봤었다. 특히 1980~90년대 WWF 프로레슬링을 즐겨본 분들이라면 AFKN으로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AFKN은 주한미군방송(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이라는 뜻이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연합군(UN)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의 반도 호텔에서 라디오 이동 방송을 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에 파병된 주한 미군 및 UN군들의 전파심리전의 일환으로 오락거리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과 위안을 주기 위해 설립되었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후에도 미군은 철수하지 않고 한국에 계속해서 주한미군으로 남았는데, 이 때부터 이동 방송국이었던 AFKN은 정규방송국으로 편제를 개편하고 1954년 반도 호텔에서 미8군 영내로 방송국을 신설해 옮기게 됐다.

이렇게 시작된 AFKN은 한국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원래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방송이었지만, 당시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도 AFKN을 즐겨보았다. AFKN이 한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각종 외화, 드라마, 뉴스 등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주요 프로그램을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의 법적 통제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정부 입장에서는 통제나 간섭에 필요성이 있을 프로그램들도 여과 없이 그대로 방송되었다.

하지만 채널 2번에서 중계방송을 하던 AFKN은 한국정부의 채널환수 조치로 1996년 4월 30일 오전 11시를 기해 방송이 끊기고 UHF 34번 채널으로 변경되었다. 방송채널 회수의 명목은 미국의 AFKN 방송이 우리나라의 윤리나 가치 기준에 크게 어긋나 한국의 문화주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정치적인 복잡한 문제를 배제한다면 AFKN은 충분히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당시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1987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에 방송하던 WWF 프로레슬링이었다. WWF는 국내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프로그램 중에 하나였다.

[SESAME STREET]
홈페이지 - https://www.sesamestreet.org/

AFKN에서는 영화나 드라마, 뉴스, 스포츠 중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그 중에 어린이들에게 제일 인기가 많았던 것은 당연히 만화영화였다. 필자도 아주 어린 시절에 트랜스포머 애니메이션을 AFKN으로 본 적이 있다(대사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애니메이션 외에도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Sesame Street(세서미 스트리트)’라는 프로그램이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우리나라로 치면 ‘뽀뽀뽀’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벌써 50주년을 맞이한 이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쿠키를 먹으면 입에 들어가는 쿠키보다 바닥에 떨어트리는 쿠키가 더 많아 항상 놀림 받았던 쿠키몬스터와 노란색의 빅 버드라 불리는 큰 새 탈을 쓴 캐릭터들이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아직도 전 세계 140개국 이상에서 4,400회가 넘는 회차를 자랑하는 초 장수 인기 프로그램이다.

[로드러너 만화]
유투브 (watch?v=GdKkI1vGsmE)

그 중에 빅버드라 불리는 노란 새는 로드러너(길 달리기새)와 늘 헷갈렸다. 비슷한 시기에 만화 영화로 인기 있었던 로드러너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라면 ‘이 새가 그 새인가?’하고 한 번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어린 시절 만화에 있던 로드러너 캐릭터가 세서미 스트리트에 빅버드로 나온 줄 알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로드러너 애니메이션은 워너브라더스의 애니메이션 ‘루니 툰’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주인공 로드러너와 그를 쫓는 코요테가 등장하며 둘의 추격전을 다루고 있다.

다소 멍청한 코요테가 주인공 로드러너에게 늘 당하는 입장으로 나오는데(왠지 치토스 느낌?) 만화를 보면 두 주인공들이 딱히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대사가 거의 없고 행동으로만 표현하는데 주인공 로드러너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기를 하면서 ‘삡삡’ 소리만 낸다. 언제나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로드러너를 잡기 위해 코요테는 다양한 기구제품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코요테가 사용하는 제품들의 브랜드가 ACME라는 것이다. ACME라는 회사는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대기업으로 미국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소재로 많이 쓰인다. 참고로 지난편 게임별곡에서 소개했던 카멘 샌디에고는 어디에? 시리즈의 주인공 형사도 ACME탐정단 소속이다.

[로드러너 게임]
http://simonsays-tw.com/web/lodeRunner/lodeRunner.html

TV에 방영되었던 만화영화 로드러너와 비슷한 시기에 1983년 브러더번드는 동명의 ‘로드러너’ 게임을 출시했다. 처음 게임 이름만 봤을 때는 엄청나게 빠른 새가 달리는 게임인줄 알았으나 브러더번드에서 출시한 로드러너 게임에는 새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만화 캐릭터가 나오는 게임인줄 알았다가 만화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잘 이해가 안 갔지만,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로드러너는 (R)oad Runner이고 브러더번드의 로드러너는 (L)ode Runner이라는 이름으로 두 로드는 Road와 Lode로 철자가 다르다.

TV에 방영되었던 달리기 새 로드러너(Road Runner)는 아타리에서 1985년 아타리 2600, 아타리 ST 기종으로 출시했다. 게임 출시 후 아타리 기종의 몰락과 함께 사라질 뻔했지만 이후 다시 IBM-DOS 버전으로 리메이크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명작 게임이 되었다. Lode Runner(로드러너)라는 게임을 처음 접 했을 때 이 게임은 Road Runner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임인가 보다 했던 것, 로드러너에 등장하는 달리기 새가 세서미 스트리트에 빅버드로 나오는 그 새인 줄 알았던 것과 같은 필자의 앞 뒤 꿰맞추기 식의 엉터리 생각이 모두 틀렸던 것이다. 어쨌든 로드러너 이 게임만 보면 갑자기 예전에 그 엉뚱했던 연관관계를 꿰어 맞추려고 노력했던 필자의 유년시절이 생각나는 게임이다.

[더글라스 스미스]
https://www.higuchi.com/item/801

로드러너 게임을 개발한 개발자는 더글라스 스미스라는 대학생이었는데 워싱턴 대학교의 물리학과 학생으로 재학중이던 1982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Prime Computer 550을 사용해 심심풀이 삼아 개발을 시작했다. 심심풀이로 만들었지만 주변에 반응이 좋아 다시 한 번 제대로 만들어보려고 하던 중 자신의 컴퓨터 Prime Computer 550 기종에서 자꾸 문제가 발생하여 고심하던 중 친한 친구 기종이 Apple II 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아예 기종은 Apple II 용으로 옮겨 버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을 같은 물리학과 친구들에게 소개했고 친구들은 이 새로운 게임에 열광했다. 친구들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더글라스 스미스는 자신이 개발한 로드러너 게임을 브러더번드에 보냈다. 당시 브러더번드는 자체 개발뿐만 아니라 다양한 채널의 유통에 관심이 많아 외부 제작 소프트웨어들을 응모받고 있었다.

하지만, 첫 응모는 브러더번드의 자체기준 심의 미달로 탈락했다. 그래도 게임 자체는 재미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브러더번드의 기준을 맞춰 수정한 버전이 1982년 12월 30일 채택되어 브러더번와 정식 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6개월 뒤 1983년 6월 23일 게임이 출시되었다. 그 뒤로 로드러너 게임은 전 세계에 여러 가지 버전으로 리메이크 되어 현재까지도 꾸준하게 출시되고 있는 초 장수 인기 타이틀 중에 하나다.

[로드러너]
유투브 (watch?v=a5KogMbB1xQ)

게임의 룰은 굉장히 간단하다. 주인공 캐릭터는 보물을 찾아 적을 피해 달아나기만 하면 되는 내용의 게임이다. 로드러너 게임이 이렇게 장수 할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는 바로 고도의 스릴 넘치는 추격전이 중요한 인기 비결이었다. AI는 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주인공을 전 방위에서 숨막히도록 죄어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보이는 그래픽을 보고 방심하다가 미칠 듯이 쫓아오는 적 캐릭터에 질겁한 기억이 많이 있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사실 이 AI는 개발자가 의도한대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드러너의 개발자였던 더글라스 스미스가 게임을 개발하면서 가장 골치 아파했던 부분은 적 캐릭터의 움직임에 관한 AI 기능이었다. 더글라스 스미스는 노련한 개발자가 아니었다. 이제 막 프로그래밍을 입문한 초보 개발자였던 상태에서 정밀하고 세밀한 AI를 구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결국 그가 개발한 AI는 치명적인 버그가 있었다. 적 캐릭터들이 더글라스 스미스가 설계한 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버그를 수정하려고 했지만 더글라스 스미스는 이제 막 초보 딱지를 뗀 개발자였기에 AI로직까지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버그를 수정하면 할수록 적 캐릭터의 AI는 엉망이 되어 갔고 게임은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그런데 더글라스 스미스가 버그 수정에 몰입하고 있을 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더글라스 스미스가 친구들에게 한 번 해보라고 건네 준 로드러너는 버그를 수정하기 이전 버전이었으나, 게임을 해 본 친구들에게 적 캐릭터의 AI가 마치 실제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이다. 만만하게 보고 우습게 여겼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쫓아 오는 적 캐릭터를 보고 질겁했다는 얘기와, 함정에 빠트리고 여유 있게 금을 채집하러 가려는데 다시 쫓아오는 것을 보고 정말로 쫓기는 듯이 긴장했다는 얘기들을 듣게 된다. 더글라스 스미스는 적 캐릭터의 AI가 사실은 버그로 인해 이상작동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지능으로 예측 가능한 수준을 벗어난 행위가 어찌 보면 실제와 같은 예측 불가능한 다양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버그 수정을 그만두고 버그가 있는 상태로 게임을 출시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서야 더글라스 스미스는 이것이 사실은 버그였음을 밝혔지만 그것이 버그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도망 다닌 사람들은 버그인지도 모르고 그 기민한 적 캐릭터의 추격에 감탄을 자아냈던 것이다. 로드러너는 출시 이후 많은 회사에서 비슷한 게임들을 출시하며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판본이 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Lode Runner]
유투브 (watch?v=KSHZM-jEBH0)

시에라온라인에서도 ‘Lode Runner: The Legend Returns’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게임을 출시했으며, 이 게임 역시 맵 에디터 기능을 제공하여 자신만의 게임을 즐겨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필자의 경우 고등학교 시절 로드러너 리턴즈를 하면서 친구들과 서로 맵을 만들어 누가 더 잘 만들었는가 경쟁하며 즐기던 기억도 있다(결국 자기가 만든 맵이 더 낫다고 싸움 밖에 안 났지만).

로드러너는 고전 게임 중에서도 제대로 된 맵 에디터 기능을 제공하는 최초의 게임이기도 하다. 맵 에디터 기능은 많은 게이머들의 상상력과 도전욕을 자극하였는데 로드러너의 다음 시리즈 작품이었던 ‘챔피언쉽 로드러너(Championship Lede Runner)’은 지옥과도 같은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데 이것은 전 세계에서 유저들이 직접 만든 스테이지를 응모 받아 그 중에서도 제일 난이도가 높은 것들 것 골라서 넣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도 2판 까지 밖에 못 깼다).

[로드러너 1(원)]
구글, 애플 / 앱 스토어 (직접 플레이)

로드러너는 단순한 로직에 비해 긴장을 멈출 수 없는 긴박한 스릴감이 살아 있는 게임으로 아직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클래식 게임 중에 하나다. 국내 게임 업체인 넥슨에서도 로드러너 1(원)을 출시했다. 원조이자 유명한 고전 게임이었던 로드러너를 기반으로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 한 후 공식 리메이크 된 모바일 게임이다. 원작자인 더글라스 스미스는 로드러너 게임의 성공 이후 1990년대 스퀘어 아메리카로 이전 하여 스퀘어 게임들의 로컬라이징 작업들에 참여하기도 하며 졸업 이후 쭉 게임 업계에서 활동했지만, 2014년 9월 53세의 나이로 타계하여 로드러너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넥슨의 로드러너1은 데브캣 스튜디오의 김동건 본부장이 자신의 명작게임으로 꼽는 로드러너를 플레이 하면서 게임 개발자를 꿈꾸던 당시를 생각하며 이제는 고인이 된 더글라스 스미스를 추모하는 작품으로, 일체의 상업성을 배제하고 무료 과금으로 출시한 것으로도 주목 받았다. 스테이지 에디터 기능도 제공하여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맵을 선보일 수도 있는 등 게임 역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명작을 리메이크로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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