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아카이빙 목적으로 초기 버전 복원, 누구나 다운로드 가능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없다. 결국에는-하고 나는 생각한다-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나는 보다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가 나를 향해 ‘나를 잊지 말아요’하고 당부했는지 그 이유도 나는 지금에야 알 것 같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향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줘요. 내가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줘요’하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중

한국 최장수 MMORPG인 넥슨의 ‘바람의 나라’는 올해로 꼭 열여덟살이 되었다. 그 동안 ‘바람의나라’는 변화를 거듭하며 진화한 모습을 보였다. 옛날의 모습이 희미한 추억으로만 남겨진 지금, ‘바람의나라’는 유저들에게 존재했다는 걸 기억되기 위해 복원 프로젝트 ‘바람의나라 1996’로 호소한다.

지난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 14(NDC 14)’에서 초기 버전으로 복원된 온라인 게임 ‘바람의나라 1996’이 처음 공개되었다. 세계 최초 온라인게임 복원 사례다. 당시 개발환경을 적용해 컴퓨터에 기계어를 1:1로 입력하는 어셈블리어 코딩(Assembly language coding), 680 x 480 해상도에 256컬러였던 그래픽 환경, 명령어를 입력해 조작하는 ‘텍스트 머드’ 기반의 게임 방식까지 그때 그 당시 그대로다.

■ 응답하라! ‘바람의나라 1996’, 아카이빙 넘어 추억을 업데이트

더 새로운 것을 찾아, 조금이라도 빨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분주한 지금 시대에 ‘바람의나라’는 왜 ‘응답하라! 1996’을 외쳤을까?

이는 NDC 14의 슬로건인 ‘체크포인트(Checkpoint)’와 관련지을 수 있다. 온라인게임의 역사는 영화나 연극 등 다른 문화예술과 비교해서는 짧다. 하지만 ’바람의나라‘는 2011년 세계 최장수 상용화 MMORPG로 기네스 기록까지 오른 게임이다. 따라서 과거 게임 산업이 걸어온 역사를 되짚어보는 동시에 최근의 트렌드와 향후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지금 시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다.

산업적 관점이 아닌 순수한 유저의 입장에서도 ‘바람의나라’의 초기 버전 복원은 환영할 일이다.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1997’ 시리즈가 연이어 히트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HOT 오빠”를 외치던 세대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 주요 문화 향유층이 되었고, ‘바람의나라’를 하느라 통신비가 20만원이나 나와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던 세대는 LOL 같이 템포가 빠른 게임을 쫓아가기엔 버거운(?) 세대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바람의나라’ 초기 버전 복구는 단순히 아카이빙(자료 저장) 차원을 넘어선 추억을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실제로 유저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넥슨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바람의나라 1996’ 게시물에는 “단언컨대 ‘바람의나라’는 최고의 게임이었습니다 ㅠㅠ”, “모뎀으로 해서 10만원 넘게 전화비 나와서 엄마한테 털리고 피씨방가서 짝사랑하던 중학교 친구랑 웨딩드레스 입고 수줍게 결혼식한게 엊그제 같은데”,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 “초기버전 복원 고맙습니다” 등 댓글이 달렸다.

■  “자료 찾기부터 난관 봉착, MMORPG는 많은 사람이 즐겨야 하는 것”

물론 복원 작업 자체는 만만치 않았다. 이번 복원 작업을 위해 김정주 NXC 대표,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정상원 넥슨 부사장을 포함한 ‘바람의나라’ 초기 개발자 7명과 원작 만화가인 김진 작가 등이 대거 참여했다.

첫 번째 단계인 ‘자료찾기’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의 소스코드와 실행파일은 물론 관련된 문서조차 없어 희미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완전한 초기 버전을 복원하기 보다 1998년과 1999년의 소스로 개발해 1996년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구현해야 했다. 이효진 저스트나인 이사는 NDC 14 강연에서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도 갔다. 게임 잡지와 공략집 등을 적극 활용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바람의나라 1996’은 초기 버전과 마찬가지로 마우스 플레이가 아닌 NPC에게 명령어를 입력하는 머드텍스트 게임에 가까운 모습을 재현했다. 여기에 당시 유저 데이터를 복원해 넣어 소위 말하는 네임드 유저의 데이터를 복원한 후, 다른 유저의 데이터도 일부 복원했다. 만약 자신이 ‘한가닥(?)했던 유저’라면 복원 버전에서 그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바람의나라’ 복원 프로젝트는 넥슨 컴퓨터 박물관에 보관 및 전시되어 관람객들은 전시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하지만 생크림 케이크는 맛있게 먹는데 본래의 목적이 있고, 실크로 만든 손수건도 눈물 콧물을 닦을 때 제몫을 다하는 법이다. MMORPG의 본질은 많은 사람이 즐겁게 플레이하는 것이다.

최윤아 넥슨컴퓨터박물관 관장은 “온라인게임을 복원하는데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했다. 그 결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운로드 형태로 프로젝트 방향을 변경했다”고 전했다. 현재 ‘바람의나라 1996’은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다운받아, 당시 유저 데이터를 이용해 접속해 ‘연’과 ‘무휼’ 등의 캐릭터로 접속해 즐길 수 있다.

최초의 온라인 게임의 복원이라는 사명감을 안고 시작한 ‘바람의나라 1996’ 버전은 게임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이지만, 유저들의 불완전한 기억과 불완전한 추억을 가장 맛있게 담아냈다. 멀리 온 유저나 새로 만나는 유저 모두 희미해질 기억을 붙잡은 ‘바람의나라 1996’에서 조금 더 게임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한경닷컴 게임톡 황인선 기자 enutty4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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