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소프트가 2일 밤 개최한 '경기필하모닉 게임음악회 리니지'를 감상한 후 출구를 나서면서 "리니지에도 정말 괜찮은 음악이 많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사실 기자는 리니지를 심도 있게 즐기지 않고 일 때문에 공부한 편이라 음악에 대해 자세하게 알진 못했습니다. 지난해 리니지W 출시로 기사를 작성하다가 메인 테마곡을 듣고 "꽤 괜찮은데?"라고 느낀 수준이죠. 이번 음악회가 기자 입장에선 리니지에 어떤 음악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인 만큼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로 향했습니다.
콘서트홀에 입장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느낀 점은 커플 관람객과 여성 관람객의 수가 기자의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는 거였어요. 보통 리니지를 즐기는 유저층이 30~50대 남성들로 알고 있었는데 오케스트라의 관객 비율을 보니까 전혀 상반된 분위기였죠. 잘못된 편견을 바로 잡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메이플스토리나 로스트아크 오케스트라를 감상했을 때처럼 리스트를 전혀 보지 않았습니다. 리스트를 파악하고 감상하면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오후 8시 정각이 되자 연주자들이 착석하고 지휘자가 등장했습니다. 이 순간은 진짜 가슴이 벅차올라요. 리니지 유저가 아닌데도 이 정도면 팬들 입장에선 정말 뜻 깊은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자는 전통 클래식을 즐겨 듣지 않습니다. 사실 문외한에 가깝죠. 로스트아크, 파이널판타지14, 메이플스토리, 리그 오브 레전드, 스타크래프트 등 게임과 관련된 콘서트가 아니었다면 평생 발을 들이지 않을 것 같은? 종종 취재로 왔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습니다. 콘서트홀에 입장하면서 굉장히 긴장했죠.
특히 전통 클래식 오케스트라를 듣는 복장, 자세, 감성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분들도 평범한 차림으로 방문한 것을 보고 "특별한 것이 없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편해졌어요. 한편으론 다소 무게감이 있는 오케스트라를 대중적으로 만들어 준 게임이라는 콘텐츠에게 고맙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곡은 '피의 맹세'입니다. 리니지의 대부분 곡이 오케스트라와 잘 어울리거나 오케스트라 기반으로 작곡됐다고 들었어요. 원작 곡을 안 들어봤기에 어떤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오케스트라에 잘 어울리는 멜로디가 분위기를 한층 웅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북소리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이때 기자의 시선은 지휘자에게 향했습니다. 로스트아크에서 지휘했던 안두현 KBS교향음악단 지휘자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었거든요. 지휘군단장이라 불릴 정도로 에너지 넘치고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이번에도 볼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며 주목했습니다.
유심히 관찰한 결과 "게임 음악을 지휘하면 에너지가 넘칠 수밖에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나라 경기필하모닉 지휘자도 주변에 불꽃이 튄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역동적이면서 열정적인 지휘를 보여주셨거든요. 그의 절도 있는 동작 하나하나가 혈맹과 의리를 중시하는 리니지의 세계관을 충분히 대변했습니다.
백드라운드 조명에도 눈길이 갔습니다. 음악 분위기에 맞춰 빨강, 초록, 보라, 노랑 등 메인 조명이 전환됐고 스크린 배경이 명확하게 뭐라고 정의할 순 없지만 노을, 동굴, 용비늘, 수면 등과 같은 이미지로 바뀌니까 신기했어요.
- 리니지 OST '공성'
- 리니지OST 별을 쫒아서
네 번째 곡인 '공성'과 '남자의 명예'는 튕기는 멜로디가 감명 깊었습니다. 차분한 곡만 이어지다가 이렇게 독특한 멜로디를 담은 곡이 연주되니까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장치로도 작용했죠. 개인적으로 스크린 영상이 곡마다 다르지 않았던 부분은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영상도 있었거든요.
여섯 번째 곡인 '별을 쫒아서'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플룻 소리를 포함한 관악기 소리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관악기 중심이고 멜로디 자체도 경쾌하니 저절로 신이 났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멜로디는 아무 생각 없이 소리에만 집중하니까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느낌있죠? 그리고 다음 연주된 곡인 '만일(IF)'은 어디선가 흔히 들어봤던 익숙한 멜로디로 구성되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숨겨진 이야기'는 관악기와 현악기 중심인 OST였는데요. 어드벤처 영화에서 낯선 모험가가 신비로운 이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 들려오는 BGM과 비슷했습니다. 굉장히 아름답게 펼쳐지는 광경 속에 굉장히 위험한 비밀이 숨겨있는 듯한,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면의 세계를 잘 표현한 멜로디였죠.
'너구리의 모험'과 '구름 위의 왈츠'에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빠른 멜로디와 함께 지휘자의 동작이 시선 포인트였습니다. 멜로디는 형사 가제트 영화에서 나올 법할 정도로 빠른데 탕! 탕! 탕! 탕! 물 수제비가 튕기는 듯한 동작에 맞춰 뚜렷하게 들리는 피아노와 북 소리가 귀를 자극했죠.
너구리의 모험는 후반부로 갈수록 분위기가 웅장하면서 경건해지는데 곧바로 구름 위의 왈츠가 연주되면서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로 바뀌니까 소프라노나 보컬이 있었다면 고도의 감정 전환을 보여줘야 했을 것 같은 상상을 하니까 재밌었어요.
- 리니지 OST '영원'
1부의 피날레는 '영원'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사실 이 음악은 제가 이미 알고 있었던 곡이더라고요. 리니지 노래인 줄 몰랐던 것이었죠. 굉장히 익숙한 멜로디에 "어? 어디서 들었던 음악인데 이게 리니지 음악이었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반가웠습니다.
게다가 이 음악이 갑자기 기억에 난 이유는 리니지W 론칭 당시 주변 지인이 기타로 연주된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에요. 리니지를 즐기지 않은 입장이라 당시에는 흘려넘겼는데 오케스트라를 통해 제대로 감상하니까 기자가 "로스트아크의 'Sweet Dream My Dear'를 들을 때와 같은 느낌이겠다"고 공감했습니다.
잔잔하면서 무게감 있는, 근엄하면서도 그리움이 느껴지는 멜로디는 리니지를 모르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말 좋더라고요. "여기에 가사를 넣는다면 티아라의 '낮과 밤'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선호도에선 앞서 언급했던 '별을 쫒아서'가 최고였지만 리니지 전체를 생각하면서 선호도를 정한다면 단연 '영원'을 선정할 정도로 명곡이었어요. 감동 그 자체. 다시 한 번 이런 좋은 곡들을 최고의 퀄리티로 선사한 리니지와 경기필하모닉에 감사했습니다.
인터미션 이후 2부는 '실베리아'라는 곡으로 시작했습니다. 1부는 웅장하면서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시작이었다면 2부는 고요하면서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멜로디로 출발했죠.
뒤이어 연주된 '피할 수 없는 운명'은 굉장히 독특한 음을 가졌습니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다가 절정에 도달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급감하는 롤러코스터 느낌이었죠. 이런 곡은 개인적으로 밀당하는 느낌이라 선호하진 않아요. 뭐랄까 정말 작은 차이로 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느낌? 현실에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에요.
이집트 입구, 아뉴비스의 공격, 파라오의 분노는 말 그대로 이집트 배경과 잘 어울렸습니다. 1999년에 개봉한 영화 '미이라'를 연상케 했죠. 스크린 영상에서는 이집트 지역 지도와 메두사, 케르베로스 등이 등장하는데 잔인한 장면이 음악과 시너지를 이뤄 긴장감을 높여준 덕분에 몰입감도 덩달아 상승했어요.
- 리니지W 메인 테마곡
2부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리니지W 메인 테마곡 'A World Pledged With Blood'이었습니다. 리니지W 론칭 당시 기자도 많이 들었던 음악이었는데요. 오케스트라로 직접 들으니까 그 웅장함이 배로 느껴졌죠. 악기들의 조화가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이뤄졌다는 걸 들으면서 재차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 영상은 기사들이 칼을 들어오였다가 내려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데요. 그와 동시에 음악도 모든 악기가 '꽝!'하고 끝나는 순간 리니지라는 게임의 절도와 무게감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후에는 군주, 기사, 마법사, 요정, 오크성, 켄트성, 은기사 등 각종 클래스와 지역의 테마가 연주됐는데요. 이 음악들이 명품 클래식처럼 높은 퀄리티로 작곡됐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확실히 게임을 즐기지 않은 입장에선 크게 와닿진 않았습니다. 리니지W 메인 테마곡이나 영원을 앙코르로 듣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앙코르는 리니지W 메인 테마곡이 선정됐습니다. 분명 30분 전에 들었는데 다시 들어도 질리지 않아요. 귀가해서도 한동안 게임하면서 노동요로 들을 계획이에요. 오케스트라의 전체적 구성은 뭐랄까 간결한 임팩트만 남겼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게임, 팬덤의 성향을 고려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개최된 로스트아크, 메이플스토리처럼 게임 음악에 대한 이벤트성 콘서트보다는 전통 음악회에 더 가까웠죠. 각자 장·단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구성도 나쁘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리니지 오케스트라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게임도 스토리에 따라 흘러가듯 오케스트라도 흐름에 따라 곡이 연주되잖아요. 메이플스토리 오케스트라의 경우 캐릭터의 성장 시점에 맞춰 곡이 연주되는 것처럼요. 이런 서사적 부분들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고 다시 오케스트라를 감상한다면 감동이 배가 될 거라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리니지를 즐기지 않는 기자가 이번 기회로 리니지 속 명곡들을 처음 접하고 좋은 인상을 새긴 만큼 이 음악들이 더 많은 분에게 널리 알려져 오케스트라에서 직접 감상한다면 정말 뜻깊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국내 첫 리니지 게임 음악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만족스러운 콘서트였어요. 최근 게임은 종합 문화 예술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서있습니다. 게임 문화 자체의 질적 향상을 위해 그 아쉬움을 계속 보완하면서 발전시키고 더 많은 기회를 꾸준하게 제공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