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최고봉 ‘듄’과 견줄 독자들을 추앙받는 판타지 문학작품 ...영화로 대흥행

영화 '반지의 제왕'의 포스터
영화 '반지의 제왕'의 포스터

지난 편에 소개한 영화 ‘듄(DUNE, 2021)’과 원작 소설에 이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중에 SF의 최고봉 듄과 견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널리 알려진 판타지 문학 작품으로는 ‘반지의 제왕’이 있다.

‘반지의 제왕’은 일명 ‘J.R.R 톨킨’으로 알려진 ‘John Ronald Reuel Tolkien’의 판타지 소설로 톨킨(Tolkien)은 ‘반지의 제왕’ 외에도 ‘호빗(The Hobbit)’, ‘실마릴리온(The Silmarillion)’ 등의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톨킨이 구성한 방대한 세계관의 설정과 세세한 묘사는 그 이후 판타지 소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그를 두고 ‘판타지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판타지문학의 최고봉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 J.R.R. Tolkien]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R-R-Tolkien
판타지문학의 최고봉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 J.R.R. Tolkien]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R-R-Tolkien

특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제작되면서 이전의 인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톨킨의 작품 세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왠지 존재할 것만 같은 생생하고 뛰어난 묘사가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러한 작품 세계의 묘사는 그의 경험에 기인하는데 실제로 톨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군인 출신이다. 톨킨은 영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11개월의 훈련을 받고 1916년 6월 7일, 영국 육군 제25사단 74여단 소속의 제11대대의 신호장교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1916년 7월 개전 당일에만 5만 8000명의 인명 손실을 낸 역사상 최악의 악명높은 전투 중 하나인 ‘솜 전투’에도 통신장교 소위로 전쟁에 참전했다. 치열한 전투 중 참호열이라는 병에 걸려 18개월을 병마에 시달리면서 전쟁 기간 동안 함께 참전한 친구들을 잃게 되는 끔찍한 경험도 겪기도 했다.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https://www.foliosociety.com/uk/the-lord-of-the-rings.html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https://www.foliosociety.com/uk/the-lord-of-the-rings.html

이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과도 같은 환경에서 병마에 시달리며 평생을 함께한 친우들을 잃게 된 톨킨은 그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틈틈이 ‘더 북 오브 로스트 테일스(The Book of Lost Tales)’라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장대한 대작 판타지 작품 세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937년 출판한 ‘호빗(The Hobbit)’은 ‘반지의 제왕’을 쓰기 전에 그 전편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톨킨이 집필한 글 중에 세상에 출간되지 않은 자료들과 그림, 편지, 초본, 수정본, 설정 등을 모두 포함하여 ‘레젠다리움(Legendarium)’이라 부르는데 ‘호빗’은 레젠다리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반지의 제왕’이 있기 이전에 ‘호빗’이 있었는데 그 역사적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In a hole, in the ground, there lived a hobbit.(땅 속, 어느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이 한 줄이 지금의 ‘반지의 제왕’이 있게 한 것이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세상을 움직인 대작을 만들게 한 저 유명한 첫 문장은 톨킨이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시절, 백지 답안지를 낸 학생의 시험지를 보고 잠시 명상에 잠기면서 끄적이다가 쓰게 된 글이다. 

그 이후 학생의 점수는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백지 답안지 한 장으로 호빗에 이어 ‘반지의 제왕’을 탄생시킨 주역이 될 줄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소린과 12가신]https://www.kotaku.com.au/2021/07/why-the-hobbit-trilogy-failed/
[소린과 12가신]https://www.kotaku.com.au/2021/07/why-the-hobbit-trilogy-failed/

소설 ‘호빗’은 빌보 배긴스와 간달프를 주인공으로 참나무방패 소린과 소린의 12가신 난쟁이들이 등장하여 모험을 떠나는 내용으로 작품상 시대로는 2941년 경의 이야기로 ‘반지의 제왕’이(3018년)의 78년 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로는 그 순서가 반대로 ‘반지의 제왕’이 먼저 제작되고 그 뒤에 이어서 ‘호빗’이 제작되었다. 참고로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김리 난쟁이는 소린의 12가신 중 오인과 형제사이인 글로인의 아들이다.

■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톨킨과 C.S 루이스의 우정

‘반지의 제왕’과 함께 판타지 세계관으로 흥행을 거둔 소설과 영화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는 ‘C.S 루이스(C. S. Lewis, Clive Staples Lewis)’이 원작자이다. ‘반지의 제왕’을 집필한 ‘J.R.R. 톨킨’과의 우정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당시에 톨킨은 투병 중에도 루이스와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J.R.R Tolkien / C.S. Lewis]https://apilgriminnarnia.com/2021/04/13/csl-v-jrrt-2/
[J.R.R Tolkien / C.S. Lewis]https://apilgriminnarnia.com/2021/04/13/csl-v-jrrt-2/

이 둘은 옥스퍼드 대학의 영어-영문학 교수진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 문학 토론과 독서 모임인 ‘잉클링스(Inklings)’의 회원으로 두 사람은 인류의 역사와 문학 그리고 종교와 신화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각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반발심과 증오로 마찰만 일으켰는데 평소에 사교적이고 친화력이 좋았던 C.S 루이스에 비해 언어학 연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사색을 즐기는 톨킨과는 성격상 전혀 맞지 않았고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다. 

특히 학문을 대하는 자세와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던 두 사람의 학자적인 자존심이 불붙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위태로운 사태까지 진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영국 본토를 방비하는 ‘홈가드(Home Guard, 또는 Local Defence Volunteers)에서 복무했다.

[왼쪽부터 JRR 톨킨, 오웬 바필드, 찰스 윌리엄스, CS 루이스]https://www.smh.com.au/entertainment/books/book-reviews-the-fellowship-literary-lives-of-the-inklings-charles-william-20160215-gmu1x6.html
[왼쪽부터 JRR 톨킨, 오웬 바필드, 찰스 윌리엄스, CS 루이스]https://www.smh.com.au/entertainment/books/book-reviews-the-fellowship-literary-lives-of-the-inklings-charles-william-20160215-gmu1x6.html

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민방위 같은 조직인데 이 당시 톨킨의 아들 마이클 톨킨은 대공포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하여 톨킨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이라는 특이한 이력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인 1937년부터 전쟁 발발 후 전쟁기간 동안 그리고 종전 후인 1949년까지 ‘반지의 제왕’ 원고를 집필하던 톨킨은 틈틈이 써오던 ‘반지의 제왕’의 원고를 루이스에게 보여주었다. 루이스는 톨킨의 그 수려한 문장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톨킨이 ‘반지의 제왕’ 집필 중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항상 곁에서 든든한 지원군이자 힘이 되어주었던 루이스는 매번 톨킨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구했다. 톨킨 역시 루이스의 끊임없는 우정과 관심에 계속해서 집필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인생과 문학, 그리고 역사와 신앙, 종교 등 인생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며 우정을 이어갔고 톨킨은 이런 말을 남겼다.

“C.S. Lewis, 나는 그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반지의 제왕’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옥스퍼드 시내를 가로지르는 ‘처웰 강(River Cherwell)’을 따라 함께 산책하기도 하며 문학과 역사, 그리고 종교와 신앙 등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톨킨과 루이스 그리고 ‘찰스 윌리엄스’, ‘험프리 하버드’, ‘오웬 바필드’, C.S.루이스의 아들인 ‘더글러스 그레셤’, 톨킨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 등이 회원으로 있는 독서 모임인 ‘잉클링스(Inklings)’에서 매주 화요일 ‘이글앤드차일드’라는 펍의 안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나눈 그들의 대화는 이후 20세기 영국 문학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피터 잭슨 감독의 3부작 영화  ‘반지의 제왕’ 초대박 흥행

[피터 잭슨 감독 Sir Peter Robert Jackson]https://hauteliving.com/2018/09/how-peter-jackson-increased-new-zealand-tourism-by-billions/661593/
[피터 잭슨 감독 Sir Peter Robert Jackson]https://hauteliving.com/2018/09/how-peter-jackson-increased-new-zealand-tourism-by-billions/661593/

영화 ‘반지의 제왕’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개봉한 피터 잭슨 감독의 3부작 영화로 ‘J. R. R.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 실사 영화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안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유명한 판타지 영화다. 

하지만 실제 영화로 제작하기 전만 해도 톨킨의 팬들에게 피터 잭슨 감독에 대한 의구심 가득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피터 잭슨 감독은 B급 스플래터(Splatter)장르의 영화만 만드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분별하고 과한 폭력적인 장면과 신체절단과 피가 튀는 장면이 가득하고 주제의식 없는 그런 B급 영화 ‘고무인간의 최후(Bad Taste, 1987)’로 데뷔한 피터 잭슨 감독은 이후 1989년 ‘피블스를 만나요(Meet the Feebles)’와 1992년 ‘데드 얼라이브(BrainDead)’ 등의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으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감독이 판타지의 거장이자 중심 기둥과도 같았던 톨킨의 판타지 대서사시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든다고 했으니 다들 놀라서 기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와 드워프의 신체가 절단되고 살이 터지고 피가 화면 가득 튀어 오르고 팔 다리가 잘린 채 달려가는 등 B급 스플래터 영화로 만들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01년 영화를 개봉하면서 감독의 전작들을 본 사람들의 걱정은 실제 ‘반지의 제왕’ 영화가 개봉되고 우려에서 감탄으로 바뀌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어 톨킨의 골수팬들조차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영화를 보고 보는 내내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살아 생전 원작자인 톨킨조차 영화화에는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수려한 문장으로 쓰여진 대서사시를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973년 작고한 톨킨이 살던 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의 주요 장면을 영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이 안 되었기 때문에 원작자마저도 영화로 제작하는 것에는 호의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영화에 대한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아서 원작 판권도 엄청 싼 값에 팔았다고 한다.

[피터 잭슨 - 프라이트너(The Frighteners)]https://bloody-disgusting.com/editorials/3674409/frighteners-25-peter-jacksons-world-miniatures/
[피터 잭슨 - 프라이트너(The Frighteners)]https://bloody-disgusting.com/editorials/3674409/frighteners-25-peter-jacksons-world-miniatures/

‘듄’ 영화가 1984년 개봉하고 기대만큼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영상 제작기술과 컴퓨터 그래픽 기술 등 당시의 제작환경과 기술로는 ‘듄’의 장대한 세계관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2021년 10월 20일 새로 개봉한 ‘듄’ 영화로 인해 ‘듄’의 세계관에 관심이 많아지게 된 것을 보면 어설픈 기술로 ‘반지의 제왕’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세간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피터 잭슨 감독이 B급 스플래터만 만들어서 질적으로 낮은 영화만 만들고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감독으로 아는 분들도 많다. 그런데 사실 피터 잭슨은 누구보다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피조물에 대한 특수분장과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기술을 일찌감치 자신의 영화에 도입하면서 많은 실험을 하던 감독이었다. 

특히 1996년 미국으로 건너가 제작한 코믹 호러 판타지 장르의 영화 ‘프라이트너(The Frighteners)’를 통해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얻게 되고 이후 이 영화에 쓰인 기술을 토대로 ‘반지의 제왕’의 주요 장면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프라이트너’를 보면 저 유령을 만드는데 쓰인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반지의 제왕’의 어느 부분에서 쓰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Army of the Dead]http://brainfart-thoughts.blogspot.com/2012/10/nokw-lord-of-rings-3.html
[Army of the Dead]http://brainfart-thoughts.blogspot.com/2012/10/nokw-lord-of-rings-3.html

영화 ‘프라이트너’에서 유령을 만드는데 쓰인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이후 ‘반지의 제왕’의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The Battle of the Pelennor Fields)’ 장면에서 아라곤이 ‘죽은 자들의 군대(Army of the Dead)’ 또는 ‘맹세를 어긴 자(Oathbreaker)’라 불리는 유령 군대를 이끌고 돌진하는 장면에서 쓰였다. 

유령 군대의 돌격 장면은 ‘반지의 제왕’ 영화 전체에서 로한의 기마대의 돌격 장면에 필적한 만큼의 장엄하고 웅대한 장면을 연출하여 이를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비록 실제 원작 소설과는 다르게 각색된 부분이 많지만 오히려 영화적인 표현력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경우도 많았고 몇몇 장면은 오히려 원작 소설을 뛰어넘는 연출력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다.

참고로 엉뚱하기로 유명한 피터 잭슨 감독은 자신이 제작한 ‘반지의 제왕’ 영화에 카메오(cameo)로 출연하기도 했다. 프로도 일행이 추적을 피해 간달프와 만나기로 한 여인숙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비를 쫄딱 맞은 모습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행인이 바로 피터 잭슨 감독이다.

[반지의 제왕 – 피터 잭슨]https://www.pastemagazine.com/articles/2020/03/peter-jacksons-lotr-was-an-improbable-miracle-and.html#an-unknown-director-an-undervalued-property
[반지의 제왕 – 피터 잭슨]https://www.pastemagazine.com/articles/2020/03/peter-jacksons-lotr-was-an-improbable-miracle-and.html#an-unknown-director-an-undervalued-property

‘반지의 제왕’ 원작의 많은 팬들의 우려와 걱정을 말끔히 날려버리고 오히려 원작 소설보다 더 흥행에 성공하여 영화 ‘반지의 제왕’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정도로 영화는 성공했다. 

현재까지 박스오피스 수익만 29억 1749만 달러(한화 약 3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어 총 제작비인 2억 8100만 달러(한화 약 3000억원)에 비해 10배 이상의 수익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피터 잭슨 감독 역시 ‘반지의 제왕 하나로 최고의 감독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 동안 판타지 영화의 불모지나 다름 업었던 한국의 경우 ‘반지의 제왕’ 1편은 2001년 12월 31일 개봉을 시작해서 총 38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해외 영화, 그 중에서도 판타지 장르라는 영화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반지의 제왕’ 2편은 1편의 성공에 힘입어 2002년 12월 19일 개봉하면서 무려 518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이듬해 2003년 12월 17일 개봉한 3편은 59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트랜스포머 개봉 이전까지 ‘외국 영화 역대 최다 관객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반지의 제왕 – 피터 잭슨]https://www.cinemablend.com/news/2488792/the-lord-of-the-rings-movies-ranked
[반지의 제왕 – 피터 잭슨]https://www.cinemablend.com/news/2488792/the-lord-of-the-rings-movies-ranked

참고로 ’트랜스포머‘의 관객 기록도 이후 한국영화 시장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극장 관람 규모도 확장되면서 1000만시대를 맞이하여 2014년 ’겨울왕국‘이 10,303,058명을 동원하며 1000만명을 돌파하고 이어 ’인터스텔라‘ 역시 1000만명을 넘었고 2015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2018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역시 1000만명을 넘어서는 등 계속해서 1000만 명 시대를 유지했다. 

참고로 2019년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1300만명(13,934,592)이 넘는 관객을 기록했다. 역대 한국 1위 관람객 동원 기록은 2014년 개봉한 ‘명량’이다. 총 1700만명(17,615,437)이 넘는 관람객을 기록하여 아직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반지의 제왕’ 영화가 20여년 전에 개봉한 것에 비하면 당시 500만이 넘는 관람객 기록은 엄청 대단한 것이다. 2002년 상반기 기준(한국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으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서울기준 관람객 50만 명(506,870)을 기록할 때 ‘반지의 제왕은 136만 명(1,361,855)을 기록한 것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 게임 – ‘반지의 제왕', 원작 소설이나 영화만큼의 큰 흥행 성적 기록 못내

소설 ‘반지의 제왕’이 출간 이후 큰 인기를 얻자 이 장엄하고 웅대한 대서사시는 보드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1970년대는 1980년대 이후 보급되기 시작한 개인용PC나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이 형성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 게임이라고 하면 보드게임이 거의 전부였다.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https://boardgamegeek.com/image/589468/war-ring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https://boardgamegeek.com/image/589468/war-ring

1960년대 이후부터 1970년대에는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 세계관을 다루는 보드게임들이 많이 출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당연 으뜸은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이었다.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은 출시하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다. 

이밖에도 ‘사우론(Sauron)’이나 ‘곤도르(Gondor)’와 같은 게임들이 연이어 출시되었다. ‘반지의 제왕’을 소재로 하는 본격적인 디지털 게임은 그 이후 한참 뒤인 1990년대에 들어서야 제작되었다. 

정식 이름을 출시된 게임으로는 1990년에 출시한 ‘인터플레이(Interplay Productions)’의 ‘JRR Tolkien’s The Lord of the Rings, Vol. 1’이 있다. 

이 게임은 최초 MS-DOS용을 시작으로 Amiga, PC-98, FM Towns와 같은 기종으로 출시되었고 SNES(슈퍼 패미컴)버전으로도 출시되었다. ‘반지의 제왕’ 게임은 당연하게도 RPG 장르의 게임으로 출시되었다. 

원작의 내용과 같이 다양한 직업의 구성원으로 원정대를 모집하여 소설의 내용에 따라 게임 스토리를 진행하게 된다. 게임 내에 메인 퀘스트 외에도 많은 서브 퀘스트와 원작의 내용을 잘 살린 것으로 최근에 출시된 ‘반지의 제왕’ 게임에 비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게임이기도 하다. ‘반지의 제왕’ 게임은 출시할 때 주요 던전의 지도가 제공되었기 때문에 수집가들에게 인기도 아주 높은 게임이다. 

[‘반지의 제왕 I, II]https://www.giantbomb.com/jrr-tolkiens-the-lord-of-the-rings-vol-ii-the-two-/3030-15954/images/
[‘반지의 제왕 I, II]https://www.giantbomb.com/jrr-tolkiens-the-lord-of-the-rings-vol-ii-the-two-/3030-15954/images/

게임 초기 출시에는 아직 RPG와 어드벤처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고 명확한 기준이 모호한 게임도 많았는데 ‘반지의 제왕’ 게임 역시 분류기준에 따라 RPG로 소개되는 곳도 있었고 액션 어드벤처라고 소개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반지의 제왕’은 다양한 장르의 게임으로도 출시되었기 때문에 장르의 명확한 설명이 혼용되거나 하는 일도 흔했다. 실제로 어드벤처 게임으로 출시된 ‘반지의 제왕’ 게임은 ‘반지원정대(The Fellowship of The Ring)’으로 RPG로 출시된 ‘반지의 제왕’ 게임보다 이전인 1986년 출시되었다. 

그밖에도 1988년 출시된 ‘The Shadows of Mordor’ 역시 어드벤처 게임이었다. 당시 제대로 된 ‘반지의 제왕’ RPG를 기대하며 기다리던 게이머들은 아쉬운 대로 비슷한 느낌의 게임들을 찾아서 즐겼는데 그때 즐긴 게임들 중 대표적인 게임이 ‘위저드리(Wizardry)’시리즈이다.

[The Gold Box Series of SSI]유튜브(/watch?v=hvAtWDFeLTM)
[The Gold Box Series of SSI]유튜브(/watch?v=hvAtWDFeLTM)

또는 SSI의 소위 골드박스 시리즈라 불리는 RPG를 많이 즐겨했다. 기존의 RPG들이 이동과 탐색 등의 지루하고 느릿하게 진행되는 게임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에 비해 전투를 통한 육성에 중점을 두어 빠르게 진행 가능한 게임으로 성공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SSI는 이후 게임 박스 패키지를 금색 상자(Gold Box)로 디자인하여 SSI의 ‘AD&D’룰에 따르는 RPG들은 모두 금색 상자로 출시되었고 ‘SSI’의 RPG하면 Gold Box를 연상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까지도 이렇다 할 ‘반지의 제왕’ 게임이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원작 소설만큼의 인지도나 인기를 얻지 못하고 더 이상 제작되지 않던 중 2001년 ‘반지의 제왕’ 실사 영화가 개봉되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다시 ‘반지의 제왕’ 게임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EA를 필두로 비벤디와 여러 업체에서 ‘반지의 제왕’ 게임화 판권 전쟁이 벌어졌다. 매년 다양한 장르의 ‘반지의 제왕’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나 19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이후 게임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 역시 월등히 향상하여 이전의 게임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사실적이고 화려한 실제와 같은 화면을 보여주는 게임들도 많이 출시되었다.

[‘반지의 제왕 게임들]구글검색
[‘반지의 제왕 게임들]구글검색

하지만, 이렇게 출시된 ‘반지의 제왕 게임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원작 소설이나 영화만큼의 큰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패키지 게임만 아니라 2007년 출시한 ‘‘반지의 제왕 온라인(The Lord of the Rings Online)’ 역시 한국의 경우 2010년 5월 31일에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반지의 제왕’ 게임들은 이렇게 패키지 게임과 온라인 게임 모두 원작 작품의 유명세에 비해 게임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반지의 제왕’ 게임들이 큰 흥행을 거두기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원작에 묶여 있는 제한요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임은 게임적인 요소로 풀어냈을 때 진정한 재미를 발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너무나 완고한 원작 설정에 묶이면 많은 가능성들에 제한을 받게 되고 이러한 부분은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참신하고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영화 ‘반지의 제왕’만 본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편한 부분이기도 하다.

[비엔나전투 1683]유튜브(/watch?v=hrJsyfk7CFg)
[비엔나전투 1683]유튜브(/watch?v=hrJsyfk7CFg)

영화 ‘반지의 제왕’ 역시 실제로는 상당부분 원작과는 다르게 각색된 장면이 많다. 영화적 연출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옳았다. 

예를 들면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The Battle of the Pelennor Fields)’에서 고전하면서 버티던 아군에 마지막 희망으로 세오덴 왕이 이끄는 6000명의 로한의 기마대가 언덕위를 내려오며 돌진하는 장면은 영화 ‘반지의 제왕’ 명장면 중에서도 꼽히는 최고의 장면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적인 사건 중 하나인 1683년의 제2차 빈 포위전에서 있었던 폴란드 최강의 기마대 ‘윙드 후사르(Polish Winged Hussar)’의 고지에서 돌격해서 내려와 결국 적군의 대병력을 격파하고 함락 위기에 있었던 비엔나를 구해내는 것을 모티브로 각색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윙드 후사르의 활약상은 영화 ‘비엔나전투 1683 (2012)’로도 만들어졌다.

즉, 영화는 영화답게 게임은 게임답게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제 가치가 빛을 발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반지의 제왕’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답습하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반지의 제왕’ 게임 대부분은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게임을 하려고 했지 영화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닌데 게임이 영화와 같다는 것 또는 영화 이상의 영상미가 가득하다는 것만 특장점으로 내세우는 게임이 과연 게이머들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는 반대로 얘기하면 아직도 기회는 충분히 남아있다는 얘기이다. 정말 제대로 된 ‘반지의 제왕 게임이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J.R.R. 톨킨의 무한한 창조의 세계에 빠져들어 그 방대한 즐거움과 재미를 함께 하기를 바란다.

■ 톨킨 편히 잠드소서....Rest in Peace

[J.R.R. Tolkien]https://mapio.net/pic/p-5520432/
[J.R.R. Tolkien]https://mapio.net/pic/p-5520432/

톨킨은 1972년 3월 28일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3년 9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에는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J.R.R 톨킨의 집필을 정리하여 ‘실마릴리온’을 비롯해 많은 책을 출간하였다. 

우리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사라지지 않았다(Gone from our sight, but never from our hearts.)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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