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몽당 크레파스 싫어 사달라고 떼쓰다 종아리 맞고 울었는데...

요양병원 병상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위해 매달 형제들이 공평하게 병원비를 내는 날에는 어김없이 카드값처럼 입금요구 문자가 온다.

문자를 읽으며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나만의 봄날 기억이 떠올랐다.

시절로 돌아간 어느 날 나는 새 크레파스를 사 달라며 계속 떼를 쓰다가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고 아파서 울고 말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는 형제들과 돌려쓰던 부러진 몽당 크레파스가 너무나도 싫었다.

좋아했던 주황색과 초록은 아예 색이 없었고, 노란색도 다른 색이 묻어 지저분해 싫었다.

열두 가지 색 중 예쁜 색은 아예 없고, 짙은 청색, 검정, 흰색 그리고 보라 등 검고 칙칙한 색만 부러지고 종이 껍질도 벗겨진 채 알몸으로 섞여 나뒹구는 지저분한 몽당 크레파스를 학교에 가져가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렇게 부러진 몽당 크레파스는 모든 색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비닐봉지에 담아간 크레파스가 창피해 여자 짝꿍에게 꺼내 놓기가 부끄러워 미술 시간이 좋아도 한 편으로는 놀림 받을까 봐 두려워 싫었다.

그래서 늘 가지고 싶었던 무지개색처럼 가지런하게 놓인 왕자표 크레파스를 새로 사 달라며 떼를 쓰다가 대문 앞에서 어머니께 빗자루로 종아리를 맞고 그렇게 골목이 떠내려가도록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크레파스를 사 주셨다. 그것도 20가지 총천연색 칼라로 무장된 웅장한 아테네 신전의 육각 기둥 크레파스였다.

뚜껑을 열자마자 기다란 옷을 입은 크레파스는 마치 나를 왕궁으로 모셔갈 버킹엄의 근위병처럼 일렬로 화려하게 정렬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보물 상자를 열자마자 황홀해하는 영화 속 주인공같이 놀랍고 마법 같은 잊지 못할 평생의 기쁨이었다.

새로운 병정들은 날마다 내 그림을 위해 학교에서 나를 빛내도록 도와주었다.

봄날 산동네는 개나리색 노랑 병정과 진달래 분홍 병정이 도왔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아카시아 나무를 초록 병정이 도왔다.

조막손에 매달려 서로 몸을 섞어 색을 만들기도 했고 덕분에 나는 수도 없이 뜯어낸 스케치북 두께만큼 상장으로 되돌려받았다.

그렇게 가난한 산동네의 풍경을 그렸던 크레파스는 내 조막손에 묻어 지금의 주름진 손까지 어려운 시절 어머니의 상처처럼 새겨져 있다.

몽당 크레파스 색이 없는 공간은 비워두고 못 칠했는데 그때 칠하지 못한 여백처럼 어머니는 마지막 삶에서 우리에게서 세월 속에 점점 낡은 그림처럼 흐려지고 만다.

내 그 시절 뜨거운 여름 마을 아래 루핑 지붕들이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그곳을 탈출하려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비로소 어른이 되어 어머니가 힘든 생활과 많은 식구 챙기느라 크레파스조차 사줄 수 없는 형편이었던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제 회초리마저도 그리워지는 시간에 서 있다. 맞아도 이젠 울지 않으며 맞아도 그때가 그립구나. 그런데 내 글을 보며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그래 언젠가 크레파스로 어머니를 그려 보기로 했다. 어머니가 주셨던 회초리는 어머니를 기억하라는 어린 시절의 모로스 신호였으며, 왕자표 크레파스는 지금의 나를 위해 만들어주신 커다란 왕관이었다.

글쓴이=주홍수 애니메이션 감독 sisi9000@naver.com

주홍수 감독 프로필

1992년 세영 애니메이션 총괄 제작 프로듀서
KBS 옛날 옛적에, 은비까비, 일본 합작 ‘나디아' 제작 프로듀서
1994~미국 할리우드 게임 JOY CINE 총감독
경민대 만화예술과 출강.일요시사 정치삽화 ’탱자가라사대‘ 연재
1998~ (주)프레임엔터테인먼트 슈퍼패밀리 원작, 각본, 감독
2001~2004 KBS TV시리즈 날아라 슈퍼보드 스토리보드, 감독
2004~㈜ 선우엔터테인먼트 스페이즈 힙합 덕 총감독
2005~2010 한국 KBS,중국CCTV '도야지봉' 원작 및 총감독. 상하이미디어그룹(SMEG). 상하이 술영화제작소 총감독.
2010 하문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해외심사위원
중국 SMG 방송 TV 시리즈, ’토끼방’ 기획, 데모제작, 총감독
2014~한국MBC,중국CCTV ‘판다랑’ 원작, 각본, 총감독
웹툰협회 고문/음원협동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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