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 기자의 e스팟] 무협지 '의천도룡기'와 게임의 로망

'중독성이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없는 것은 게임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모처럼 손에 잡은 김용의 무협지 '의천도룡기'(김영사) 때문이다. 8권짜리 전집의 마지막 권을 들고 있노라니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누가 그랬던가. 좋은 책은 읽다가 가끔 멈추고 그 장면을 상상하게 되거나, 저자를 만나고 싶고, 어떤 구절에 대해 곰곰 씹어 보는 일이 많다고. 그리고 그때는 이미 중독된 것이라고.
 
기자가 대학생 시절이던 1980년대에도 김용의 '영웅문' 열기는 가히 광풍이었다. 최근 그의 무협지에 대해 "한갓 장르 소설을 순수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라고 격상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노신의 '아Q정전'을 제치고 그의 '천룡팔부'가 중국 교과서에 실린 정도니 두말해서 무엇하랴.
 
의천검과 도룡검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스토리 라인을 지닌 의천도룡기의 마지막 장 앞에서 절실하게 느껴진 것은 무협지 속에 깃든 남자들의 로망(꿈이나 야망)이다.
 
남자들은 대개 10대의 강을 무협지와 빨간책을 통해 건넌다. 세상을 평정하는 영웅을 꿈꾸지만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들은 주경야동(?)한다. 그들 중 무협지파는 이제 커서 온라인 게임을 통해 또 다른 로망을 만난다.
 
해적판을 빼고도 전 세계 3억 명이라는 김용의 무협지 독자들은 단순한 칼싸움이나 얽히고설켜 들어가는 무림 각 문파의 절세 무공에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다. 정파와 사파의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 사랑과 복수, 권력 상층부의 파워 게임과 음모 등을 통해 현실을 되씹어 본다.
 
독자들은 시끄러운 강호에 나와 한순간에 난세를 평정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이나 CEO 등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 보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로망도 키운다. 그런 의미에서 무협지파 남자들은 '리니지'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서양 판타지 MMORPG(다중역할 수행게임)의 주 유저층이라 할 수 있다.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드라마에 '몰빵'한다. 소녀들은 순정 만화와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통해 10대를 건넌다. 가난한 여자 아이가 늘 백마 탄 남자 만나서 팔자 고치는 것이 주요 스토리 라인이다. 신데렐라를 꿈꾸고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만 안 오니까 동경한다. 그리고 희망 사항이 된다. 그러다가 원망한다. '원하면서 원망하는' 공식은 커서 드라마로 이어진다.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꿈꾸는 것이 로망이라고 한다면 남자들은 슈퍼맨 콤플렉스나 영웅주의를 무협지에서 배우고, 게임을 통해 발전시킨다. 여자들은 하이틴 로맨스를 거쳐 드라마로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의천도룡기의 로망과 게임·드라마의 로망은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어쨌든 현실의 나를 벗어난 자리에 '또 다른 나'가 거기 있으니까 말이다.

박명기 기자 일간스포츠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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