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파트너 닌텐도, 파이터판타지7 기점 등돌려...게임보이용 ‘성검전설'서 화해

[성검전설(聖剣伝説) 1]유튜브(/watch?v=-P6kWrTr9hQ&t=7532s)

스퀘어는 ‘파이널판타지’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으로 회사의 경영 사정이 나아진 덕분에 다른 게임도 개발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생겼다.

이시이 코이치는 드디어 자신이 생각했던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파이널판타지’라는 꼬리표를 떼지는 못했지만 ‘성검전설–파이널판타지 외전(聖剣伝説 ファイナルファンタジー外伝)’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이시이 코이치에게는 감사한 일이었다.

‘성검전설’의 시리즈 첫 작품은 1991년 6월 28일 게임보이용으로 발매된 액션 RPG였다. 이 때는 이미 가정용 콘솔게임기 시장이 8비트를 넘어 16비트 시장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흑백화면의 휴대용 게임기였던 게임보이용으로 출시했다는 것은 회사에서 이 게임에 거는 기대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성검전설’ 1편이 출시될 당시에는 가정용 콘솔 게임기시장에 닌텐도의 16비트 게임기 슈퍼패미컴과 세가의 16비트 게임기 메가드라이브가 서로의 시장을 장악하고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뺏기 위해 필사적인 싸움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비트 전쟁이 시작되어 게임기 판매 광고 문구에 ‘16비트’라고 써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 세대인 32비트 하드웨어에는 이런 양상이 점차 과열되어 32비트 CPU 2개를 사용하여 ‘32비트 + 32비트 = 64비트’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64비트 게임기’라고 광고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억지스러움에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지만 당시에는 하드웨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일반 대다수의 사람들의 인식과 비트 수가 높으면 뭐 하나라도 더 성능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이를 노린 악랄한 상술이 더해져 비트전쟁이라고까지 불리는 어이없는 상술광고가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성검전설(聖剣伝説) 1]유튜브(/watch?v=-P6kWrTr9hQ&t=7532s)

하지만, 16비트니 32비트니 치고박고 하는 것들은 다 남들 얘기였고 ‘성검전설’은 철저히 주류로부터 외면받은 채 시작했다. 이시이 코이치가 성능이 떨어지는 휴대용 게임기로 게임을 개발하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성검전설’ 1편은 닌텐도의 게임보이용으로 출시가 결정되었다.

대대로 스퀘어는 닌텐도와는 단순한 서트파티 동맹 이상의 혈맹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고 닌텐도의 패미컴과 슈퍼패미컴 플랫폼을 기반으로 자사의 ‘파이널판타지’ 전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공존공생 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터였다.

이런 혈맹 관계는 ‘파이널판타지7’을 기점으로 양사간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닌텐도의 최고 파트너는 스퀘어였고 스퀘어는 닌텐도를 떠난 타사의 플랫폼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파이널판타지’ 전 시리즈를 닌텐도의 게임기로 출시하면서 ‘파이널판타지7’ 역시 이미 닌텐도의 차세대 플랫폼인 ‘닌텐도 64’로 출시하는 것으로 발표되었고 닌텐도측으로부터 막대한 게임 개발비용과 보조금 등을 지원받기도 했었다.

닌텐도 입장에서도 신규 출시하는 차세대 게임였던 ‘닌텐도 64’의 대표 게임으로 ‘파이널판타지7’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게임기 판매량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사간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스퀘어가 소니에게 이 돈을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이적하는 것을 결정하면서 닌텐도측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당시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회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격분하며 다시는 닌텐도 진영에 스퀘어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야마우치 히로시]https://www.latimes.com/local/obituaries/la-et-ct-hiroshi-yamauchi-nintendo-dies-obit-20130919-story.html

하지만, 어른들의 비즈니스 사정이라는 게 감정만으로 되는 건 아닌지라 그 이후 다시 닌텐도의 NDS에 ‘파이널판타지’ 시리즈가 이식되는 등 관계가 회복되기도 했다. 그래도 ‘저 놈의 스퀘어 꼴도 보기 싫다’며 격분하던 감정이 누그러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그렇게 스퀘어와 닌텐도는 혈맹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그리고 다시 파트너로서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관계의 감정기복이 심하게 극단적인 케이스였긴 하지만 ‘성검전설’이 개발될 때만 해도 양사간의 관계는 돈독했고 공고한 파트너십을 근간으로 서로간의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비전이 있었다.

하지만, ‘성검전설’은 당시 닌텐도의 주력이었던 16비트 게임기 슈퍼패미컴으로 출시한 것이 아니라 휴대용 8비트 게임기였던 게임보이로 출시가 결정되었다. 게임보이는 1989년 4월 21일 출시한 휴대용 게임기로 닌텐도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인 요코이 군페이가 개발한 게임기로 기존의 휴대용 게임기들이 1개의 게임만 가능했던 게임기였던 것에 비해 게임 카트리지를 교체하면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STN 반사식 흑백 액정을 사용한 것이 SEGA의 휴대용 게임기가 칼라였던 것에 비해 약점으로 지목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판매량을 달성했다.

[Nintendo GAME BOY]

다만, 액정의 특성상 빠른 움직임을 처리해야 하는 슈팅 게임이나 액션 게임등은 액정이 흐릿하고 잔상이 남는 문제로 취약점을 지니긴 했어도 2000년 기준으로도 이미 누적 판매량 1억대를 돌파하여 2005년 기준으로도 전 세계 판매량 1위를 달성한 게임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닌텐도의 입장에서 게임보이는 절대 주력 사업의 포지션은 아니었고 집에서 즐기지 못하는 특수한 환경에 있을 경우 대체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조형의 성격이 강했다. 게임보이용으로 이식되는 게임들도 대부분 원작에 비해 간소화되거나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닌텐도의 입장에서는 패미컴과 슈퍼패미컴 같은 주력기종도 신경써야 했지만 휴대용 게임기에 출시해야 할 게임들의 라인업도 관리해야 했었다. 이 과정에서 스퀘어는 굳이 조공의 형식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무언가 제품 라인업에 협력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CASIO 손목시계 게임기]

왜냐하면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는 개발 1부의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회장은 당시 개발 2부 부장이었던 ‘우에무라 마사유키’에게 “놀지만 말고 뭐라도 하나 해보라”며 1980년대 아타리 게임기와 같은 가정용 게임기들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만들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것이 닌텐도의 8비트 콘솔 게임기 패미컴이었다.

패미컴 출시 초기에는 이렇다 할 게임이 ‘동키콩’과 ‘마리오’밖에 없어서 결국 허드슨, 남코, 타이토, 캡콤, 코나미, 자레코와 같은 6개 회사에 라이선스 우대정책으로 닌텐도 포함 7개 연합군을 구축하여 시장을 개척해나갔다. 문제는 개발 1부였다. 개발 1부에서는 ‘게임 & 워치’라는 휴대용 게임기를 이미 1980년 4월 28일에 출시한 상태였고 게임 & 워치 시리즈는 총 4340만대가 넘게 팔렸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닌텐도는 1970년대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인한 경영악화로 1980년 70억 엔(약 786억 1210만 원)의 부채를 지고있는 상태였고 1977년 닌텐도에 입사했던 미야모토 시게루조차 “이거 잘 나가는 회사인 줄 알았는데 내일 바로 망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자금 상황이 엉망인 회사였다.

이런 회사를 게임 & 워치의 판매로 40억엔(약 449억 2120만 원)의 흑자를 내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으니 한때 위기의 순간 닌텐도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게임기였다.

이때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 & 워치는 사회적인 현상으로까지 부상하며 아이들이 하나씩은 갖고 싶은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계산기와 전자 손목시계를 주로 만들던 다른 업체에서도 “액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화면을 만들면 이게 곧 게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계산기는 물론 전자 손목시계에도 게임기능을 탑재하기 시작했다.

요코이 군페이는 개발 1부의 부장이었다. 요코이 군페이의 게임 & 워치에서 보다 발전하여 게임 카트리지를 교체하는 방식의 게임보이가 출시되자 닌텐도는 가정용 콘솔 게임기 사업부와 휴대용 게임기 사업부로 나뉘어 서로 경쟁 아닌 경쟁을 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닌텐도의 수장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 회장은 위기의 순간 회사를 살려낸 개발 1부의 게임보이를 홀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Game & Watch - Lion (c)1981 Nintendo]유튜브(/watch?v=OWWYYwNvbBQ)

개발 2부의 패미컴 출시로 다시 한번 회사가 확장되어 이전에 없었던 호황을 누리고는 있었지만 개발 1부의 은공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당시 닌텐도의 핵심 파트너사들은 닌텐도 회장 야마우치 히로시의 의중에 따라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보이용 게임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과 스퀘어의 입장에서도 새롭게 출시하는 게임의 가능성을 미리 점검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어우러져 ‘성검전설’은 게임보이용으로 출시가 결정되었다. 스퀘어측에서도 게임 출시 이후 확실한 성공의 보장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검전설’이라는 게임 이름 뒤에 굳이 ‘파이널판타지 외전’이라는 부제를 붙여서 출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닌텐도의 시장점유율은 거의 독점에 가깝다시피 했고 미국의 주 검찰과 법무부는 닌텐도에게 반독점 규제와 혐의로 기소를 하기도 했다.

그에 따라 미 연방거래위원회에서는 닌텐도의 반독점 혐의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결국 게임의 조악한 품질로 인한 제2의 ‘아타리쇼크’와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항변 했던 닌텐도의 서드파티 계약 조항은 1991년 4월 최종 합의하면서 철회되었다.

[성검전설(聖剣伝説) 1]유튜브(/watch?v=-P6kWrTr9hQ&t=7532s)

1990년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90% 가까이를 닌텐도의 패미컴이 장악하고 있던 최절정기였기 때문에 당시 닌텐도에게 칼을 빼드는 것은 고사하고 등을 돌린다는 것은 게임기 시장에서 손을 떼고 철수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도 EA는 닌텐도의 반독점 행위에 따른 서드파티 품질 계약 조항에 반발하여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손을 떼고 PC게임으로 눈을 돌린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닌텐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야마우치 히로시 회장과 닌텐도를 위기의 순간에서 구해준 일등공신이었던 개발 1부의 요코이 군페이, 그리고 개발 1부의 게임보이 출시와 더불어 개발 2부의 신규 사업이었던 패미컴 출시까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게임보이를 홀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패미컴과 슈퍼 패미컴을 소홀히 할 수도 없었던 중소 게임 개발 업체들은 눈치보기식으로 적당히 닌텐도의 콘솔용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 라인업을 분배해야 했었다.

그것이 닌텐도가 강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눈치 있는 사업가라면 비니지스의 근간을 헤아려 눈밖에 벗어나지 않되 최대한 자극하지도 않는 범위 내에서 자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내부 속사정이야 어쨌든 ‘성검전설’ 1편은 1991년 6월 28일 게임보이용으로 ‘성검전설-파이널판타지 외전(聖剣伝説 -ファイナルファンタジー外伝-)’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게임보이 게임으로는 흔치 않았던 액션 RPG라는 흔치 않은 장르와 깊이 있는 스토리로 게임보이 최고의 게임으로 선정되기 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게 스퀘어의 입장에서는 닌텐도에게 할 만큼 했고 닌텐도의 입장에서도 최고의 파트너사였던 스퀘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이시이 코이치 자신에게 추기작을 추진할 수 있는 대의와 명분이 확고해졌다. 모두가 만족할만한 상황에서 ‘성검전설2’는 시리즈 1편의 스펙을 뛰어넘어 바로 슈퍼 패미컴용으로 출시하기로 결정되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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