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업체에서 벗어나 어엿한 중견 개발사로 발돋움

[Warcraft]
이미지: 유투브(/watch?v=PqczlhTpT2I)

게임별곡 시즌2 [블리자드-‘워크래프트’]

마이크 모하임과 앨런 애드햄은 젊은 시절 창업을 통해 많은 게임을 만들었고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이름으로 만든 게임보다는 외주작업을 통해 개발력만 제공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렵게 결과는 냈지만 금전적인 보상과 명예는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블리자드는 서서히 온전한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많은 게임 개발을 통해 스스로의 개발력에 자신이 생기기도 했고, 이제 개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유통과 배급의 중요성을 알게 됐기에 본격적으로 회사 이름을 알릴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워크래프트’는 그렇게 남의 일만 해주던 과거의 설움에서 벗어나 미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임이다. 원래는 역사를 소재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 예정이었지만, 다른 나라 역사에 큰 관심도 없었고 역사 고증을 위해 다시 역사 공부를 하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개발자들의 반대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대신 아무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자기들이 만든 것이 정답이라 외쳐도 공식적인 정답이 없는 분야를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판타지 세계관이다. 

판타지 세계관은 어느 정도 그 기준이 정립되어 있고 고정된 캐릭터와 콘셉트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이 합당하다고 느껴지게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대중들이 인지하고 납득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지금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들에서 판타지 세계를 소재로 한 것들은 자고 나면 새로운 것이 나올 정도로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블리자드는 역사적 정확성에 구애받지 않고 독창적인 열정을 불태우기에는 판타지 세계관이 더 낫다는 의견에 결국 판타지 세계관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도 ‘상도’라는 것이 있어서 남이 먼저 먼저 그 기준을 제시하고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갖다 썼다가는 온갖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워크래프트’ 역시 발매 초기에는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게임이다(아니 게임에 ‘오크’가 나오면 끝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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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래프트’는 발매 초기에 ‘듄2’와 ‘워해머’에 비교되며 갖은 굴욕을 당했다.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짝퉁 워해머’라든가 ‘세계관만 바뀐 듄2 아류작’이라며 ‘워크래프트’를 폄하하는 기사들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게임이 실제 발매되고 유저들의 호평을 얻으면서 ‘워크래프트’에 대한 악평도 점점 사라져갔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왜냐고? 재밌으니까. 게임의 기본인 ‘재미’에 충실했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콘셉트도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콘셉트만 화려하고 섬세해도 정작 재미없어서 망한 게임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워크래프트’는 사실 다른 게임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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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가 초기의 설욕을 딛고 꾸준히 자신들의 게임을 만들어 가면서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원작으로 비교당했던 ‘워해머’보다 ‘워크래프트’가 일반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게임이 되었다. 발매 초기만 하더라도 블리자드는 RTS의 명가라 불리는 웨스트우드에 비견될 만한 입지가 아니었다. 웨스트우드는 이미 ‘듄’ 시리즈로 온 세상의 칭송을 받으며 RTS의 신기원을 이뤄냈다는 평가와 함께 RTS의 시작이자 끝을 알리며 기준을 제시하는 권위자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워크래프트’를 개발할 당시만 하더라도 블리자드는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외주 작업으로는 간신히 회사를 운영해 나가기에도 부족한 자금 사정으로 공동 창업자들이 이미 수만 달러에 이르는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자체 개발 게임인 ‘워크래프트’에 개발자들을 집중시키면서 그나마 푼푼이 돈벌이라도 해주던 외주 작업을 맡아서 진행하기에도 힘들었다. 또 신규 개발자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꿈같은 얘기였기 때문에 ‘워크래프트’는 어떻게든 성공해야 했다. 

어찌 보면 배수의 진을 치고 사활을 건 프로젝트가 바로 ‘워크래프트’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다른 게임의 유사성에 대한 비판이나 아류라는 모욕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자신들의 열정만 믿고 모인 사람들이 춥고 배고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내가 굶으면 열정! 남을 굶기면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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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게임의 기본적인 시스템은 당시에 RTS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듄2’를 참고했다. 여기에는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이 있다. 일단 내부적으로는 블리자드의 개발자들이 ‘듄2’를 상당히 즐겼다는 것이다. 당시에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듄2’를 해봤을 것이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다. 

‘워크래프트’의 프로듀서이자 리드 프로그래머였던 패트릭 와이엇이 쓴 글(자신의 블로그)에 의하면, ‘워크래프트’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웨스트우드 스튜디오가 만든 ‘듄2’라는 게임을 플레이하고 난 뒤였다고 한다. 그 때 블리자드의 직원들은 점심시간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가 ‘듄2’에 빠져 있었고 업무 이후에도 ‘듄2’를 즐겼다고 한다(왠지 업무시간에도 즐겼을 것 같지만 대놓고 그렇게 쓰지는 못 했던 듯).

그렇게 지겹도록 ‘듄2’를 하면서도 그들이 내내 아쉬웠던 점은 말로만 ‘듄2’에 대해 떠들어대지 실제로 서로 대결을 못하니까 누가 ‘듄2’의 실력자인지 가늠하기가 도통 어려웠다는 점이다(물론 좋게 포장해서 즐거움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이라고 해두자). 그래서 결국 ‘워크래프트’에는 사람과 사람이 경쟁 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 시스템을 탑재하게 되었고 그것이 ‘워크래프트’의 특장점 중에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듄2’는 전 세계의 모든 RTS 게임에서 차용하고 있는 자원채취나 가공, 건물 빌드, 병력생산 등 뭘 바꿔보려고 해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기본적인 근간을 만들어 놓았기에 참고를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인 외부적인 요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RTS 게임은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고, 이미 RTS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방식의 RTS게임은 엄청난 리스크를 바탕으로 하는 도박과 같은 행위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블리자드는 ‘듄2’의 아류작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았겠지만 ‘듄2’의 게임방식을 기꺼이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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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림만 바뀐 ‘듄2’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최대한 자신들의 색을 입히고자 했다. 무엇보다 앞서 얘기 했던 싱글 플레이만 가능했던 ‘듄2’에 비해 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을 특장점으로 내세웠다. 이 때 마이크 모하임 역시 개발자로 참여하여 특히 멀티 플레이 기능 중에 모뎀(MODEM)관련 기능을 개발했다. ‘워크래프트’의 당시 기술적인 문제와 게임 시스템적인 문제로 인해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부대 지정은 4명 밖에 안됐지만, 당시에는 그게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고(정작 듄2는 4명은 고사하고 1명 밖에 선택이 안 됐었다) 엉성한 AI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너무 재미있었으니까(지극히 주관적인 필자의 의견입니다).

[Warcraft]
이미지: https://worldofwarcraft.com/ko-kr/story/timeline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드디어 게임이 출시되었지만 게임이 출시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나날을 보냈는지 당시의 개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워크래프트’를 개발할 때 블리자드 내부 사정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게임 개발에 필요한 디자이너 인력조차 충원하기 힘들어서 ‘듄2’의 그래픽을 캡쳐해서 사용했다고 한다(물론 개발목적으로만 사용하고 나중에 다시 다 교체 했다). 프로그램팀도 마찬가지로 지금과 같은 소스관리(형상관리) 시스템이 없어서 직접 자신들이 작성한 소스를 플로피 디스켓에 옮겨 담아서 서로 합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에 잘못 작성된 코드가 다시 되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당시 블리자드 개발자들은 소스 형상관리와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 때만 해도 블리자드의 전 직원은 20여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20명이 4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을 만큼 회사의 자금사정도 좋지 않았고 미래도 불투명한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블리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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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그렇게 온각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출시한 ‘워크래프트’는 초기의 비난과 악평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판매량이 늘어갈수록 비판적인 평가는 호의적인 평가로 바뀌어 갔다. ‘워크래프트’는 한 해에도 수 없이 출시되는 하나의 게임에 불과했지만, 블리자드에게는 이 하나의 게임이 자신들의 전부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블리자드가 아니었다. 회사를 창업하고 나서 남의 게임이나 푼돈으로 개발해주고 주인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며 어려운 시절을 버텨내고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들의 이름으로 게임을 출시했다. 직접 유통과 배급을 하면서 고생해서 번 수익을 여기저기 뜯기고 뺏겨서 정작 손에는 몇 푼 쥐지도 못하던 예전의 블리자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게임 하나로 블리자드는 당당히 일어설 수 있었고 그 자금을 바탕으로 드디어 블리자드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워크래프트’는 게임 역사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게임이지만, 블리자드 입장에서는 그 의미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게임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로 이어지는 모든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이 이 때 정립되었고 ‘워크래프트’ 1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자체 게임 개발이 가능한 개발사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Warcraf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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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년 뒤 전설의 ‘워크래프트2’가 출시되었다. 불과 1년의 기간이었지만 더 이상 예전의 블리자드도 아니었고 더 이상 예전의 ‘워크래프트’도 아니었다. 발매 초기 ‘듄2’의 아류작이라는 비아냥도 이제는 찾아 볼 수 없었고 누구나 2편이 하루라도 빨리 출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파이날판타지’ 시리즈가 발매 초기 라이벌 게임인 ‘드래곤퀘스트’의 짝퉁이라고 비난받다가 2편 3편을 거쳐 ‘드래곤퀘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작품으로 인정받았듯이, ‘워크래프트’ 역시 ‘듄2’ 이후 ‘Command & Conquer(C&C)’와 경쟁하는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게임 잡지나 매체에서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블리자드의 주력 간판 게임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출시 후 1년도 안 되어 1997년 9월에는 누적 판매량 120만장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하게 된다. 당연히 그 해의 베스트셀러 PC 게임으로 선정되었고 이제 블리자드는 어엿한 중견 게임 개발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다음 편에 워크래프트 2, 3편이 이어집니다.)

■ 필자의 잡소리

[Warcraft II]
이미지: 유투브(/watch?v=JbIYTRkMXXw&t=154s)

2016년 영화로도 개봉된 ‘워크래프트’는 원작 게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국내에서는 흥행이 소문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개봉 당시 중국에서는 크게 흥행했다고 한다(북미 기준으로는 적자). 국내에서는 최종 관람객 116만명으로 최근 1000만을 논하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영화지만, 오랜 시절 블리자드의 게임을 즐겨온 분들이라면 정말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 또한 반지의 제왕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판타지 영화로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았다. ‘워크래프트’ 영화 속편이 언제쯤 나올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마도 ‘왕좌의 게임’ 시즌 8이 먼저 나올 것 같다. 흥행 실적이 기대한 만큼 좋지 않아서 속편 제작이 될지도 의문이지만 2017년 블리즈컨에서 영화의 후속편에 대한 질문에 마이크 모하임은 “워크래프트는 다양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이야기의 경우 영화가 첫 시도였고, 앞으로도 다른 다양한 시도들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었다(아마 안 만든다는 얘기인 것 같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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