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존스, 게임 폭력성 수정해달라는 닌텐도 요구 거절
게임별곡 시즌2 [데이빗 존스]
지금까지 총 2편으로 이야기한 ‘레밍즈’와 ‘GTA’의 개발자는 같은 사람이다. 두 게임의 온도차는 굉장히 극단적이기에 같은 회사의 같은 개발자가 만든 게임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레밍즈’를 개발한 사람은 DMA Design의 David Jones(데이빗 존스)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DMA Design의 창업자이기도 하다. 취미로 게임을 만들던 학생 시절의 성공으로 보다 더 전문적인 게임 사업을 하고자 회사를 설립했고, 회사 설립 후 첫 작품으로 ‘Menace(메나스)’라는 슈팅 게임을 개발했다. 이 게임은 Psygnosis에서 유통을 맡았고 2만장 이상을 판매하면서 당시 기준으로 2만 파운드(한화 기준 약 290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게임이 발매 된 때가 1988년임을 감안할 때 당시 약 2900만원의 돈은 굉장히 큰 돈이었다. 한국의 경우 라면이 100원이고 짜장면이 650~800원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첫 작품의 성공으로 다음 게임 개발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두번째로 ‘Blood Money(블러드 머니)’라는 게임을 개발했다. 이 게임 역시 개발비 이상을 뽑아내며 흑자 수익 전환에 성공했고 당시 4만장 이상을 판매했다.
그 당시 DMA Design의 핵심 개발자였던 마이크 데일리가 받았던 급여가 272파운드였다. 첫 게임과 두 번째 게임으로 6만 파운드 이상의 수익을 올렸는데, 창업 초기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감안 했을 때 향후 몇 년 이상은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큰 돈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공한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에서 쓰인 그들의 그래픽 처리 횡 스크롤 기법은 다음 게임에 쓰일 중요한 핵심 기술이 되었다.
데이빗 존스는 ‘블러드 머니’를 개발하던 중에 일본의 ‘Irem’에서 만든 ‘Mr. HELI’라는 게임을 접했다. 데이빗 존스가 생각하기에 ‘Mr.HELI’는 자신이 만든 슈팅 게임들과는 무언가 많이 달랐다. 밝으면서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잘 살아 있는 ‘Mr.HELI’ 게임을 본 데이빗 존스는 자신의 게임에도 부드러운 애니메이션에 귀엽고 아기자기한 콘셉트를 적용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블러드 머니’라는 슈팅 게임이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게임들은 지나치게 무겁고 진중한 주제를 담고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만들지 않더라도 결국 즐기는 사람들이 즐거운 게임이 좋은 게임의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 때 자신이 만들고 있는 게임들이 게임 본래의 취지인 재미보다는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면에 치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첫 번째 게임과 남이 만든 게임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두 번째 게임을 성공시킨 이후 드디어 세번째 게임 개발이 시작되었다. 바로 ‘레밍즈’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주제를 담으면서도 남들이 성공하는 이유를 분석했다.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벗어나 밝고 명랑하면서 부드러운 스크롤의 그래픽 기법을 살릴 수 있는 재미있는 게임, 그것이 레밍즈의 개발 계획이었다. 이렇게 만든 ‘레밍즈’는 익히 아시다시피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DMA Design은 한 동안 ‘레밍즈’에 빠져 살았다. 한 게임에 집중하여 플랫폼별로 시리즈를 개발하기만 하면 장밋빛 미래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레밍즈’의 유통과 제작을 맡은 Psygnosis가 돌연 소니에게 인수당하면서 얘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게 된다(이 일로 현재 레밍즈의 판권은 DMA Design의 계보를 잇는 락스타 노스가 아니라 소니에게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모도어까지 도산을 하면서 ‘레밍즈’의 주력 플랫폼이었던 아미가 PC 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비운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된다. 아미가 PC는 한 때 컬러 그래픽과 스테레오 사운드로 중무장해 여느 콘솔 게임기 부럽지 않은 하드웨어 성능을 자랑했다. 하지만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으로 PC시장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콘솔 게임기 시장을 장악하지도 못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아미가 PC가 몰락하자 그 여파로 아미가 PC에 집중하고 있던 많은 중소업체들 역시 줄줄이 도산을 하게 되는데, 게임업체들 역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DMA Design도 그 중에 하나였다. ‘레밍즈’로 아미가 PC에만 집중하다가 자칫 그 꿈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사라질 뻔 했다.
그렇게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이 어둡기만 한 앞날을 걱정하던 데이빗 존스에게 한 줄기 영광 같은 빛 줄기가 내리는데 그것은 바로 닌텐도와의 만남이었다. DMA Design 시절 슈퍼패미콤(SFC)용 게임을 제작한 인연으로 닌텐도의 차기 플랫폼인 닌텐도 64의 게임 개발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도 게임기 발매와 함께 동시 발매하는 타이틀 회사 중에 하나로 선택된 것인데, 이 자체만으로도 게임 개발사 입장에서는 영광과도 같은 일이다. 이 때문에 데이빗 존스는 흔쾌히 수락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게임은 후에 ‘바디 하베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게임은 데이빗 존스의 평소의 철학이 담긴 게임으로, 주인공이 외계인들과의 전쟁으로 인류를 위해 고군분투 하는 내용의 게임이었다. ‘GTA’의 개발자답게 게임의 시스템 또한 굉장히 높은 자유도를 설정해 게임 맵에 보이는 거의 모든 탈 것을 조종할 수 있고 전투 장면 또한 치열하고 긴박한 순간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잘 짜여 있었다. ‘바디 하베스트’는 ‘GTA’의 전신이라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데, 특히 무한의 가까운 자유도를 특징으로하는 오픈 월드 방식의 게임인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높은 자유도의 설정과 긴박하고 치열한 전투장면이 문제가 됐다. 닌텐도의 아버지이자 닌텐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존재인 미야모토 시게루가 난색을 표한 것이다. ‘마리오’ 시리즈를 비롯해 미야모토 시게루의 게임들을 보면 폭력성을 찾아보기 무척 힘들다(아니,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폭력적인 장면을 억지로 꼽으라면 마리오가 버섯을 밟는다든가 거북이 등을 밟아 날려보내는 정도다.
선정성, 폭력성 이 두 가지와 가장 거리가 먼 개발자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미야모토 시게루일 정도다. 그의 게임들은 온 가족이 다정하게 둘러앉아 서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단란하고 오붓한 가족문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터트리고 날아가고 귀를 찢는듯한 비명 소리가 나는 ‘바디 하베스트’는 아무리 좋게 봐도 이것이 미야모토 시게루의 눈에 들리 없었고, 결국 닌텐도는(정확히는 미야모토 시게루는) DMA Design에게 정식으로 게임의 수정을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이래라 저래라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짓은 게임 개발자들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 중에 하나다. 돈으로 갑질하는 퍼블리셔들이나 하는 일인데, 그것을 천하의 닌텐도가 협력업체의 동시 발매 타이틀이라는 입장을 빌미로 게임내용의 전폭적인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이 일로 데이빗 존스는 닌텐도에게(정확히는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된다.
데이빗 존스가 생각하는 ‘게임’이란 어느 한 틀에 묶이거나 얽매이지 않고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풀어내어 또 하나의 사실적인 가상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의 가상의 삶은 현실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과 분석에 기인한 높은 자유도를 필요로 했다. 그 자유는 폭력적으로 표현될 수 있고 그 반대로는 선행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을 정해두고 그것에 맞춰 내용을 만들어 가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닌텐도는 그 모든 것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갈 수 있는 길만 열어주고 다른 모든 길의 가능성을 배제했다. 왜 모든 게임 주인공들은 꼭 인류를 위해 희생해야 하고 공주를 구해야 하며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가?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정부나 권력자)가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온전히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GTA’의 핵심을 관통하는 철학적인 명제이자 사회에 던지는 데이빗 존스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그것을 전면에서 거부당하고 수정하라는 권유(를 가장한 지시)는 그의 모든 것을 해체당하고 해부 당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닌텐도와 친밀도를 다져두는 것이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발매하기 직전인 닌텐도 64는 차세대 64비트 게임기로, FC(패미컴), SFC(슈퍼 패미컴)을 이어 전통적으로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의 거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닌텐도 64의 성공이 당연시 되는 분위기에서 게임만 동시 발매 타이틀로 출시하기만 하면 자신은 물론 회사(DMA Design)의 위상 역시 높아질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표현의 자유)과 또 다른 자신의 모든 것(미래의 성공)을 두고 고민하던 데이빗 존스는 결국 양자 택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것(표현의 자유)을 선택했다. 결국 닌텐도는 게임의 폭력적인 내용을 수정하지 않으면 절대 닌텐도에서 발매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통보했고, 이 일로 닌텐도와 데이빗 존스는 냉랭한 사이가 되었다.
DMA Design과 닌텐도의 사이는 게임 발매를 취소하면서 결국 틀어졌다. 처음과는 달리 점차 독보적 존재에서 독재로 바뀌어가는 닌텐도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닌텐도는 과거 8비트 시절부터 천하를 호령하는 콘솔 게임기 시장의 절대강자로, 사실 중소 게임개발 업체들에게는 갑질로 유명한 회사이기도 했다.
비록 그것이 온전한 선의를 지향했다 하더라도 개발사 입장에서는 닌텐도의 결정은 절대적이었다. 닌텐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당시 FC, SFC의 게임 방식인 롬 카트리지로 만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자사의 게임기에 사용한 롬 팩을 독점 생산하고 있었기에 닌텐도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닌텐도의 게임기에서 게임을 발매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닌텐도의 후속 기종을 소니와 공동 작업을 하던 중에 일이 틀어진 이유 중에 하나도 소니의 CD 드라이브 라이선스와 닌텐도의 독점 권리와의 문제가 불거지면서이다(그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지만).
그 당시 닌텐도 64는 북미에서만 2500만대 이상 판매되었다. ‘슈퍼 마리오 64’와 ‘마리오 카트 64’ 그리고 ‘젤다의 전설(시간의 오카리나)’ 등의 게임에 힘입어 언뜻 잘 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차세대 게임기의 CD-ROM 방식과 롬 카트리지 방식의 채택을 두고 서드파티들의 불만을 무시한 닌텐도의 처사에 서드파티 게임업체들은 대규모 이탈하게 된다. 이로 인해 닌텐도는 FC에서 SFC로 이어지는 가정용 콘솔 게임기의 폭군 체제를 끝내고 라이벌들에게 점차 자리를 내주고 멀리서 지켜보며 예전의 향수에 빠져 사는 처지가 되었다.
이 당시 닌텐도와 혈맹에 가까울 정도로 친 닌텐도파에 속하던 업체 중에 하나인 스퀘어도 이탈했는데, 이는 닌텐도에게도 굉장히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스퀘어는 결국 닌텐도64를 이탈하여 ‘파이날판타지 7’을 소니의 플레이 스테이션(PS)용으로 출시했고, 소니는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 안착하게 되었다. 반대로 닌텐도는 점점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힘을 잃어갔다(자세한 내용은 게임별곡 시즌2 – 닌텐도편 참조)
데이빗 존스의 닌텐도 탈퇴 선언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지키기 위해 다가올지 모르는 더 큰 성공(돈)과 맞바꾼 인생 일대의 결정이었지만, 그것은 결론적으로 더 큰 성공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닌텐도와 결별할 때만 해도 딱히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출시 직전까지 갔던 ‘바디 하베스트’는 데이빗 존스와 DMA Design의 이름이 아닌 미드웨이(MIDWAY)라는 회사에서 출시하게 된다(그래도 결국 출시하긴 했네).
(다음 편에 데이빗 존스와 DMA Design의 GTA 시리즈 첫 작품인 GTA 1편 개발 비화가 이어집니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