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회사의 핍박 속에서도 세계적인 히트작 ‘버블보블’ 탄생시킨 주역

[전국민 게임 버블보블]
(이미지 – https://www.YouTube.com)

게임별곡 시즌2 [타이토 2편] 
 
한국에서 흔히 ‘보글보글’이라 불리는 ‘버블보블’은 게임을 좀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히트작이다. 그런데 이 게임이 온갖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눈물겨운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버블보블’은 애초에 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할 뻔 했다. 

타이토(TAITO)의 창업주는 일본인이 아니라 마이클 미샤 코간(Майкл Коган)이라는 유대계 소련인이다. 그는 타이토양행(太東洋行)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창업했고, 이 회사는 후에 타이토 무역 주식회사(太東貿易株式会社)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초기 사업의 주 종목은 ‘보드카’의 판매였다.

애초에 타이토는 게임과는 거리가 먼 업종이었다. 본래 무역업을 하던 타이토는 창업 초기에 주로 무역업에 치중하면서 번외(番外)로 슬롯게임과 인형 뽑기 기계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게임이 주업종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던 중 번외로만 취급하던 게임 사업 중에 1973년 전세계적인 열풍을 몰고 온 아타리의 ‘퐁(PONG)’ 게임을 카피한 ‘ELEPONG'(エレポン)’이라는 게임이 히트하면서 게임 사업부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타이토는 그 여세를 몰아 1978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하면서 초대박을 터트렸고, 그때까지 번외 사업부로 취급받던 게임 사업부가 벌어들이는 돈이 회사 전체 다른 부서의 수익을 훨씬 앞지르게 됐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타이토는 무역회사에서 본격적인 게임사로 회사의 사업계획과 운영방안을 변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1984년 창업주 마이클 미샤 코간이 미국 출장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면서 회사의 전체적인 운영 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창업주 사망 이듬해인 1985년 타이토는 잘 나가던 게임사업과 별개로 영상 가라오케 기기 사업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필자의 추측이다.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대히트를 기록한 1978년에서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게임산업이라고 하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게임의 부정적인 면을 집중 조명해서 폭력성이나 음란성으로 접근하는 보도 역시 흔히 볼 수 있다. ‘어디 애들 코묻은 돈을’이라는 시선도 존재한다. 40년 전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그런 분위기였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타이토가 게임사업부의 폭발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운영방안을 쉽게 바꾸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초대 창업주의 사망으로 회사의 운영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신흥 게임사업부 관련 이사진과 기존 전통 사업을 영위하던 사업부 관련 이사진들의 세력 다툼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창업주가 사라진 이후 각 사업부간의 회사 독점에 대한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에 한 세력은 게임사업부가 회사를 점령하는 것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전혀 새로운 분야에 대한 사업을 진행시켜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아마도 대외적으로는 사업성의 다변화, 경쟁력 있는 신사업 발굴 등의 명목으로 가라오케 기기 사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일본의 가라오케 기기 시장에서는 Xing, 세가뮤직 네트워크, 타이토, 토에이 비디오(Toei Video) 등이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일본의 가라오케 시장은 한국의 노래방과 흡사할 정도로 대중적이다. 현재 일본에는 펍을 비롯한 술집에만 35만개 이상의 업소에 가라오케 기기가 설치돼 있고, 한국의 노래방과 같은 가라오케 룸은 1만개 이상, 호텔이나 여관과 같은 숙박시설에도 1만5000개 이상의 업소에 가라오케 기기가 설치돼 있다.

이 시대에 일본에서 최초로 순수 국산(일본산) 쥬크박스 1호를 개발한 곳이 타이토다. 타이토는 1954년 쥬크박스 임대 사업을 시작하고, 2년 뒤인 1956년에 일본 최초의 자국산 쥬크박스를 개발한 이후 1962년에는 미국과의 사업권을 획득했다. 이 시절 타이토의 힘있는 사업부는 쥬크박스 관련 음악, 영상기기 사업부였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시대상에 맞물려 쥬크박스로부터 시작하여 가라오케 사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컸을 것이고, 관련 사업부의 위상은 기세등등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게임 하나가 회사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니 사업부간의 갈등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던 중에 창업주가 불운의 사고로 생을 달리했다. 한 인간의 업적을 정리하고 추모하며 일치단결해 회사의 향방을 논의해도 모자랄 판에, 창업주가 사라진 타이토는 내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차기 권력 구도를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처럼, 타이토 역시 1984년 창업주 사망 2년 뒤인 1986년 교세라에 인수되는 수모를 겪게 됐다. 잘 나간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있는 게임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타이토가 교세라에 인수되기까지 2년간의 기간을 대외적인 문서에는 ‘여러 번의 내부 진통을 겪었다.’ 정도로만 소개되어 있다. 다만 그 기간에 얼마나 치열한 물밑 작업과 사업부간의 권력 쟁탈이 심화되었는지는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필자의 추측이다. 

[교세라 로고]

교세라는 현재 일본에서도 자산 30조원 이상의 대기업 집단이고 우리에게는 프린터나 카메라 등으로도 잘 알려진 회사이다. 주로 디지털 카메라나 휴대전화나 휴대전화 스마트폰, 전자부품, 반도체부품, 광통신부품 등으로 잘 알려진 회사이다. 1959년 교토 세라믹으로 창업하여 초기에는 세라믹 관련 사업이 주업종이었다. 한 마디로 이 회사도 게임 업종과는 완전 거리가 먼 회사였다.

교세라에 인수된 타이토는 모기업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당시 닌텐도, 세가, 남코, 코나미 등에 버금가는 게임 업계 대장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외형상 규모를 키웠을 뿐 내부적인 사업 진행 방향은 대기업의 전통 사업을 운영관리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교세라의 타이토 운영 방식은 전혀 게임산업에 맞지 않았다.

게임개발 관련 직종과 전통적인 사무직 위주의 대기업 사업 관리는 전혀 이질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당시에 타이토를 담당하는 교세라의 임원들도 게임 지식이나 경험이 전무한 문외한들이나 다름 없었다(아니 애초에 굳이 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인수한 회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그들로서도 막막했을 것이지만, 그 당시 교세라의 만행에 가까운 무지한 게임사업부 운영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떠도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MTJ, 게임 버블보블 개발자]
(이미지 – https://www.youtube.com/watch?v=zxp_XdTWW6w)

이 때 갖은 핍박과 설움을 당한 것이 ‘버블보블’의 개발자인 MTJ이다. MTJ는 미츠지 후키오(三辻富貴朗)’의 코드명(닉네임)이다. ‘버블보블’ 외에도 후속작 ‘레인보우 아일랜드’와 같이 전연령층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아기자기한 게임을 많이 만들었는데, 무역업에 치중하던 타이토를 일약 세계적인 인기 게임회사로 성장시킨 주역이 바로 그였다. 회사의 운이 다해 교세라에 인수된 뒤에 모진 압박과 견제를 받고 이룬 성과이기에 더욱 빛났다.

그는 ‘버블보블’ 개발 당시 수시로 윗사람(교세라 측)에게 불려다니며 게임 출시 이후 성과를 못 내면 퇴사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세라믹이나 반도체, 정보통신 같이 점잖은 사업을 추진 하던 교세라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디 애들 코 묻은 돈을’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세라의 예상과는 달리 ‘버블보블’은 출시 이후 빅히트를 기록하며 순식간에 전세계 아케이드 센터를 장악했다. 한국에서도 어느 오락실을 가더라도 ‘보글보글’이라 알려져 있는 ‘버블보블’의 음악이 들리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한 때 한국의 오락실 초기에는 ‘방구차’라는 게임의 음악이 늘 들렸었는데, 이제 그 자리를 ‘버블보블’이 차지한 것이다.

[MTJ, 게임 버블보블 엔딩]

 

100판이라는 긴 여정을 달성하고 나면 HAPPY END를 축하하는 음악과 함께 게임 엔딩 크레딧이 나온다. 여기를 보면 STAFF에 MTJ라고 당당히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는 여세를 몰아 1987년에는 ‘버블보블’의 속편격인 ‘레인보우 아일랜드’를 개발하고 1988년 ‘사이버리온’을 개발한 이후 1989년에 땅따먹기 게임인 ‘볼피드’를 개발하는 등 1년에 한 작품씩 꾸준히 게임을 개발했다.

하지만 내부 갈등은 계속되었는지 결국 ‘볼피드’를 출시하고 MTJ는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 때 회사의 게임 개발 주축이었던 개발자들도 대거 이탈해 다른 회사에 영입되거나 별도의 독립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아마도 게임 사업부의 주축이었던 MTJ가 회사를 떠나게 된 배경에는 기존 사업부의 권력투쟁이 있었고, 그가 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실제로 MTJ가 회사를 떠나자마자 1990년 타이토는 노래방 기기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물론 노래방 사업은 게임 사업만큼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2006년 파트너 회사들에 사업권을 전부 양도하게 된다.

타이토가 그 뒤로 출시한 게임들 역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결국 2005년 스퀘어에닉스에 인수됐다. 그리고 현재는 ‘타이토스테이션’이라는 아케이드 게임센터를 주축으로 게임 퍼블리싱, 프라이즈용 상품공급 등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먼 길을 돌아 지금까지 왔지만 과거의 영광도 미래의 보장도 없는 현실에서 타이토의 화려한 재기를 꿈꿔본다.
 
■ 필자의 잡소리

1980년대 타이토를 일약 세계적인 게임회사로 키워내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MTJ는 ‘버블보블’, ‘레인보우 아일랜드’ 등 지금 즐겨도 손색없는 귀여운 캐릭터와 귀에 착 감기는 BGM 등 명품 게임들을 만들었다. 회사를 떠난 후에는 후진양성에 힘쓰고자 자신의 이름을 딴 게임스쿨 MTJ 게임스쿨이라는 곳을 설립, 수 많은 게임개발자를 게임업계에 진출시키며 후학을 양성해냈다.

[究極!!PC原人]
(이미지 – http://blog.livedoor.jp/shige19840901/archives/52077508.html)

1994년에는 ‘究極!!PC原人’ 개발에도 참여했다. 전체적인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느낌이 ‘버블보블’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게임 엔딩과 상위 스코어에 MTJ라는 이름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케이드용으로는 정식 출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콘솔 게임기용으로 출시되었다. ‘FC원인’, ‘슈퍼원인’, ‘GB원인’ 등 각 콘솔 플랫폼에 맞춘 이름으로 출시되었는데 귀여운 원시인이 박치기를 하는 게임으로 기억에 남은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평생을 게임을 위해 살았다. 당시 일본의 아케이드 게임센터의 분위기가 한국의 오락실처럼 불량아들의 집합소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안타까워,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재미있고 유쾌한 게임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버블보블’을 개발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적이고 활발한 활동도 오래 가지 못했다. 2008년 12월 11일, 신장질환으로 의한 의식불명이 계속된 끝에 향년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많은 게임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인생을 다 바쳐도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게임은 한정돼 있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보다는 나무 심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미츠지 후키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저작권자 © 게임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