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땀, 픽셀 : 트리플 A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3> 스타듀 밸리

‘피, 땀, 픽셀 : 트리플 A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3> 스타듀 밸리

앰버 헤이그먼(Amber Hageman)이 에릭 바론(Eric Barone)을 처음 만난 건 프레첼을 팔던 때였다. 그녀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시애틀 남부에 있는 오번 슈퍼몰에서 일하고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동료였다. 바론은 눈동자가 짙고 수줍게 미소 짓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헤이그먼은 소소한 게임부터 뮤지컬 앨범, 그림까지 뭐든 만들기 좋아하는 그의 열정에 끌렸다. 머지않아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 일본 게임 ‘하베스트 문’에 빠진 두 연인

두 사람 모두 농장을 가꾸는 잔잔한 일본 게임 ‘하베스트 문’ 시리즈를 좋아해서, 나란히 플레이스테이션을 쥐고 앉아 ‘하베스트 문: 백 투 네이처(Harvest Moon: Back to Nature)’을 하며 데이트를 했다. 컨트롤러를 앞뒤로 움직여 마을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양배추를 심으며 돈을 벌었다.

[스팀 <하베스트 문: 희망의 빛> 스크린샷]

2011년, 관계가 깊어진 두 사람은 바론의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바론은 워싱턴 대학교 터코마 캠퍼스에서 컴퓨터과학 학과를 졸업하고 신입 프로그래머 일자리를 찾아 고군분투 중이었다.

“불안하고 초조했죠.” 바론은 말했다. “면접에 서툴렀어요.” 그는 집에서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보내다가 문득 생각했다. ‘비디오게임을 만들면 어떨까?’ 프로그래밍 실력을 쌓고, 자신감도 높이고, 괜찮은 회사에 취직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는 액션 게임 ‘봄버맨(Bomberman)’의 웹 기반 클론 같은 큰 프로젝트에 손을 대본 적이 있었지만 어느 하나 완성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무엇을 시작하든 끝을 보자고 다짐했다. 헤이그먼에게는 다음 채용 시즌에 맞춰 6개월 안에 게임을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바론은 소박하지만 명료한 비전을 세웠다. 자기만의 ‘하베스트 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고맙게도 원작은 상표 분쟁과 품질 저하로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으며, 근래에는 그렇게 평온한 게임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하베스트 문’ 1, 2편과 똑같지만 다른 맵이 있는 게임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플레이하고 싶었다.” 그는 말했다. “같은 내용을 다양하게 반복하면 게임을 끝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런 게임이 존재하지 않았죠. 그래서 왜 아무도 그런 게임을 만들지 않는지 고민했습니다. 분명히 그런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말이에요.”

■ 취직도 포기하고 ‘스타튜 밸리’ 개발...툭하면 뒤집는 과정

2011년 말, 바론은 취직을 포기했다. ‘스프라우트 밸리(Sprout Valley)(이후 ‘스타듀 밸리(Stardew Valley)’로 제목을 바꾼다)’ 프로젝트에 몰두한 그는 정식으로 회사에 들어가 단조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 게임부터 완성하고 싶었다.

‘스타듀 밸리’의 기본 전제는 간단했다. 캐릭터를 만들고 머리부터 바지 색까지 외형을 꾸민다. 게임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펠리칸 마을에서 살기 위해 시답잖은 사무직을 때려치운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이 되어 농작물을 기르고 마을 주민들과 친분을 쌓으며, 펠리칸 마을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과제를 수행한다.

바론은 ‘하베스트 문’에서처럼 ‘스타듀 밸리’에서도 씨앗을 심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만족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심지어는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모드로 친구들과 팀을 짤 수도 있다.

바론의 일상은 거의 그대로였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여덟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 정도씩 게임 작업에 몰두했다. 헤이그먼이 집에 오면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가 ‘스타듀 밸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느 캐릭터랑 결혼하고 싶어?”, “어느 캐릭터랑 키스하고 싶어?”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바론은 집세를 낼 필요가 없어 몇 달 동안 이런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지만 이내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바론의 부모님 집에서 지낸 덕분에 돈을 모을 수 있었지만 불편한 점이 많기도 했고 시애틀 시내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바론은 비디오게임 프로젝트로 땡전 한 푼 벌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대학생인 헤이그먼이 주말에는 커피숍 바리스타, 방과 후에는 돌보미로 일하며 두 사람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저희는 소박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았어요.” 헤이그먼은 말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이런 생활도 자리를 잡아갔다. 바론은 비디오게임 작업을 하고, 헤이그먼은 식비와 생활비, 좁은 원룸의 월세를 냈다.

인내심이 많지 않은 여자 친구라면 이 상황을 견디지 못했겠지만, 헤이그먼은 별로 개의치 않은 듯했다. “부모님 집에 있을 땐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시애틀로 이사를 온 뒤로는 그의 생활비를 대야 한다는 사실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래도 전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그가 워낙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좌절할 수가 없었어요.”

사실이었다. 바론은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 다만 효율성이 몹시 낮았다. ‘스타듀 밸리’의 모든 것을 혼자서 만들다 보니 아무도 그에게 책임을 묻거나 일정을 맞추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컴퓨터 의자 뒤를 서성거리며 그만 다듬고 마무리 지으라고 쪼아대는 프로듀서도 없었다. 그는 언제든 멋진 기능이나 흥미로운 친구 캐릭터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주 게임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정말 도움이 필요했던 부분은 일정 관리였다. 게임 개발자 중에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릴 것 같은 작업을 기준으로 대략적인 프로젝트 단계를 구성하는 사람도 있고, E3 같은 행사에서 공개할 시험판을 중심으로 일정을 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론은 아침에는 테마 곡을 만들고 싶었다가 오후에는 캐릭터 포트레이트나 낚시 메커니즘 제작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SNES 따라 하기를 마치고 픽셀아트를 창작하기 시작한 뒤 아무 때나 2D 스프라이트를 둘러보다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작업을 갈아엎고 다시 시작했다.

■ 마법 주문처럼 “몇 달 만 더. 딱 몇 달 만 더”...도공처럼 마음에 안들면 박살

헤이그먼과 다른 가족들은 바론에게 ‘스타듀 밸리’가 언제 완성되냐고 묻기 시작했다. 한두 달이면 된다고, 그는 답했다. 두 달 뒤, 가족들은 다시 물었다. 몇 달이 좀 더 걸린다고, 그는 말했다.

시간이 흐르고, 바론은 계속 시간을 늘려서 공표했다. 석 달 뒤. 여섯 달 뒤. “돈은 없고 함께 삶을 꾸리고 싶어 하는 여자 친구가 있는 상황에 혼자서 게임을 만들려면,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이 일을 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저를 만류하지 않게요.” 바론은 말을 이었다.

“저를 믿으라고 모두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아, 5년이 걸릴 거예요’라고 했다면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어요. 영악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사람들을 매번 조금씩만 기다리게 해야 한다는 걸 무의식중에 알았던 것 같아요. ‘아, 6개월이 걸릴 거예요. 1년이 걸릴 거예요. 네, 2년이 걸리겠네요.’”

매일같이 ‘스타듀 밸리’ 제작에 매달린 지 근 1년째인 2012년 중반에 바론은 웹사이트를 열고, ‘하베스트 문’ 팬 게시판에 자신의 게임에 대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던 게시판 사용자들은 금세 ‘스타듀 밸리’에 빠져들었다.

이 게임은 지금껏 숨어 있던 슈퍼 닌텐도 게임을 20년 만에 발굴해 산뜻하게 색을 새로 칠한 듯 생생하고 다채로웠다. 물론 스프라이트는 정교하지 않았지만 ‘스타듀 밸리’의 명랑한 농부가 땅에서 하얗고 자그마한 순무를 캐는 모습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스팀 <스타듀 밸리> 스크린샷]

2013년 5월 17일, ‘스타듀 밸리’는 스팀 그린라이트에서 충분한 표를 얻었다. 흥분한 바론은 웹사이트에 가서 점점 불어나는 팬들에게 근황을 알렸다. “게임을 최대한 재미있고 풍성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타당한 일정 안에서) 여러분께 이 게임을 최대한 빨리 전해드리기 위해 체계적으로 최선을 다하겠다. 일 진행을 예측하기 어렵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출시 날짜는 아직 알려드릴 수 없다. 그러나 제가 매일 열심히 일하면서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믿으셔도 됩니다!”

몇 달 만 더. 딱 몇 달 만 더. 바론은 개발을 하면서 어둠의 수렁을 헤매는 와중에도 이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자신의 게임이 그저 그렇다는 자괴감이 찾아왔다. “형편없는 게임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바론은 자신을 다그쳤다. “더 잘 해야 했어요. 이대로는 대박을 터뜨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집념에 불타오르는 도예가처럼 몇 달을 고생해 만든 기능과 코드를 버리며 ‘스타듀 밸리’를 갈기갈기 조각냈다. “어느 순간에는 거의 다 완성했다고 생각했어요.” 바론은 말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바뀌죠. ‘그래, 아직은 아니야. 아직 마음에 안 들어. 이 정도에 내 이름을 걸 순 없지.’”

■ ‘시간 걸리고 외로운’ 나홀로 4년 개발...스팀 차트보고 환호성

두 사람은 돈에 쪼들리기 시작했다. 모아둔 돈이 바닥을 보였지만 헤이그먼은 학부 졸업을 준비하느라 아르바이트밖에 할 수 없었다. 바론은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스팀에서 게임이 정식 출시되기 전 미완성 버전을 판매하는 얼리 액세스에 ‘스타듀 밸리’를 내놓을까 고민했지만, 게임을 완성하기 전에 사람들의 돈을 받기는 찜찜했다.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그 대신 시애틀 시내에 있는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안내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매주 몇 시간씩 극장에서 일한 덕분에 둘은 빈털터리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앰버 헤이그먼이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실에 취업하면서 돈에 대한 고민을 한시름 덜었다(2015년에 그녀는 대학원에 입학해 식물생물학을 연구하며 정식 급여를 받았다). 그녀는 혼자 생활비를 버는 것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매일 집에 와서 ‘스타듀 밸리’의 근사한 모습을 보며 바론을 재촉했다. “난 실망스러울 것 같아.” 헤이그먼은 말했다. “너도 이제 넌더리가 나잖아. 그냥 출시하지 그래?” 그해 말, 바론의 팬들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스타듀 밸리’는 어디 있나요?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죠?

혼자서 게임을 만드는 것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매사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꼭 지켜야 할 일정이 없기 때문에 한 기능을 90퍼센트 정도 완성했다가도 질리면 다른 기능에 손을 대곤 했다.

거의 4년째 ‘스타듀 밸리’를 만들고 있지만 출생과 결혼 같은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은 아직 끝내지 못했다. 옵션 메뉴 코드를 짜는 것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게임을 시작해서 첫째 날부터 플레이하면 모든 게 다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제가 게임을 거의 완성했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바론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손봐야 할 것투성이예요.” 이렇게 부족한 기능들을 말끔히 손보려면 몇 달은 족히 필요했다.

두 번째 어려움은 외로움이었다. 바론은 4년째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앰버 헤이그먼을 제외한 사람과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아이디어를 논의할 동료도 없고,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게임 업계의 추세에 대해 투덜거릴 사람도 없었다. 창작에 대한 전권을 손에 쥐는 대신 고독을 받아들여야 했다. “1인 개발자가 되려면 오랫동안 혼자 있어도 괜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론의 말이다.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전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그래도 외로운 건 어쩔 수 없죠. 안내원 일을 한 것도, 가끔씩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2016년 2월 26일, 진이 빠진 에릭 바론은 ‘스타듀 밸리’를 공개했다. 여자 친구, 하우스메이트 재러드와 로지가 휴가를 내고 위층에 앉아 게임이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을 바론과 함께했다. 세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는 동안 바론은 스팀 개발자 계정을 바라보았다. 라이브 차트를 클릭하면 ‘스타듀 밸리’를 구입하고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차트를 열면, 게임이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에릭 바론은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너무 오래 지쳐 있었고, 친구들이 아무리 게임을 추켜세워도 바깥세상이 그의 ‘하베스트 문’ 클론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걸 살까? 정말로 좋아할까? 쳐다보지도 않으면 어쩌지?

* 이 글은 『피, 땀, 픽셀』(한빛미디어, 2018)의 일부를 재구성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글쓴이 제이슨 슈라이어

필자 제이슨 슈라이어는 게임 웹진 '코타쿠'의 뉴스 에디터다. 베일에 가려진 게임 업계의 냉혹하고 다양한 주제를 끈질기게 취재하며 명성을 쌓았다. '코타쿠' 전에는 '와이어드'에서 게임 칼럼을 썼으며, 그 밖에도 뉴욕 타임스, 에지, 페이스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해왔다.

역자 권혜정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는 '테트리스 이펙트'(한빛미디어, 2018), '이기적 진실', '뮤지엄, 뮤지엄'(이상 비즈앤비즈), '예술 속 문양의 세계'(시그마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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