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I, 4년동안 11개 이상의 ‘AD&D’ RPG 쏟아내다

■ 장르의 확장 – RPG의 세계로 

SSI라는 회사는 자신들의 회사 이름에도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듯이 ‘STRATEGIC SIMULATIONS INC.’라는 전략 시뮬레이션게임을 만드는 회사다. 하지만 정작 더 많이 만든 게임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라 전혀 다른 RPG 장르의 게임들이다.

[SSI – 우리도 RPG 만든다!]
(이미지 – http://gbc.zorbus.net/)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른 장르의 게임들과는 차별성이 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시각적인(그래픽적인) 부분도 물론 중요하지만 시작적인 부분의 중요성 보다는 내부적인 계산처리와 관련 된 부분을 더 중요시 한다는 점이다. 시뮬레이션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의 실험이기 때문에 워낙 다양한 변수가 발생하고 매 순간마다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그 상황에 따라 다시 또 수 없이 많은 분기점이 존재하는 부분들의 검증을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 어떤 장르의 게임보다 수학적인 이론과 지식이 필요한 분야이고 그에 따른 연산처리 능력이 중요시된다.

그러다 보니 1980년대 CPU성능이 PC의 발전 속도에 비해 느렸던 콘솔 게임기 보다는 PC에 보다 더 적합한 장르였고 게임 출시의 개수만 보더라도 압도적으로 PC용으로 출시된 시뮬레이션 게임이 더 많았다.

[Dungeon Hack (1993, SSI)]
(이미지 – https://steemit.com/gaming/rpg-review-dungeon-hack-1993-ssi)

시뮬레이션이라는 용어나 개념 자체가 애초에 게임을 위해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분야보다 게임에 어울리는 것만은 확실하다. 단순하고 획일적인 시스템이나 직선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 주어진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에는 분명 재미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언제나 당대 최신의 기술과 트렌드를 따라갔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CG(컴퓨터 그래픽)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도 TV광고나 영화에서나 쓰이는 돈 많이 들고 구현하기 쉽지 않은 고급 기술이었지만, 점차 게임과 융합하면서 최근에는 게임의 CG가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물론 처음에는 게임의 일부 타이틀 화면이나 스테이지 분기점에서나 쓰이는 등 Full CG 게임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최근의 AR/VR과 같은 신기술도 게임과의 융합에서 볼 수 있듯이 게임은 언제나 당 시대 최신의 기술을 흡수하며 그것을 대중에게 널리 전파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해왔다.

[Forgotten Realms: The Archives – Collection 1]
(이미지 – https://www.gog.com/game/forgotten_realms_the_archives_collection_one)

시뮬레이션 이라는 분야 역시 그 행태적인 부분이나 기술 활용의 분야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그 용어가 등장하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지는 불과 4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게임은 역시 재빠르게 그 용어를 차용하여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워 게임’의 마니아였던 조엘 빌링즈(Joel Billings) 역시 그런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즐겨 하고 있던 워 게임이 가지고 있던 형태적인 특성이 시뮬레이션에서 뜻하는 그것과 닿아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 없기에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예측을 통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워 게임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였고 그것을 단어 하나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바로 ‘시뮬레이션(Simulation)’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설명할 단어가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회사 이름에도 ‘SIMULATIONS’이라는 단어를 넣었고 창업 초기에는 회사 이름에 맞게 현실 세계에서 즐기던 워 게임을 PC로 즐길 수 있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개발하고 유통을 했다.

[Forgotten Realms: The Archives – Collection 2]
(이미지 – https://www.gog.com/game/forgotten_realms_the_archives_collection_two)

그런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다 보니 자신들이 잘하는 분야가 어떤 분야인지 알게 되었고 수치 계산적인 부분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를 생각해 보니 RPG가 눈에 띄었다. 워 게임(보드 게임)과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세상에 널리 전파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TRPG라는 게임이 있었고 워 게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테이블에 모여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동일했다. 

즉, 내가 상대해야 하는 상대가 나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의 생각은 내가 알 수 없기에 온갖 다양한 상황이 존재하며,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가에 따라 내가 선택해야 될 것들이 정해진다. 그래서 턴이 반복될 때 마다 상황과 상황에 맞물린 것들을 모두 계산할 수 있어야 했다.

워 게임(보드 게임)을 컴퓨터로 즐길 수 있게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들을 많이 개발하다 보니 TRPG 역시 장르의 구분만 다를 뿐, 내가 직접적으로 조작하는 것 외에는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게 구성되어진 큰 틀은 비슷했다. 누군가와 팀을 이루거나 적의 관계로 매 순간 마다 움직임과 전투에 따른 계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Forgotten Realms: The Archives – Collection 2]
(이미지 – https://www.gog.com/game/forgotten_realms_the_archives_collection_three)

SSI가 개발하거나 출시(유통)한 RPG들은 ‘AD&D’ 룰에 따른다. ‘AD&D’는 ‘D&D’의 확장판이다. ‘D&D’는 ‘Dungeons and Dragons’라는 이름으로 그 기원이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나름대로 역사가 깊다. ‘D&D’에서 보다 확장된 것이 앞에 ‘Advanced’가 붙어서 ‘Advanced Dungeons and Dragons’가 되어 보통 줄여서 ‘AD&D’라 부른다.

‘D&D’는 게리 자이각스(Gary Gygax)의 ‘Chainmail’이라는 미니어처 워 게임에서 시작되어 캐릭터 성장과 장비(아이템)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현재까지도 통용되는 일반적인 RPG가 갖는 기본 특성을 만들었다. 워 게임 마니아였던 조엘 빌링즈 역시 ‘D&D’, ‘AD&D’ TRPG의 매력에 빠져있었고, 당시 게리가 만든 ‘Chainmail’이라는 게임은 게임 대회를 진행할 만큼 성공한 인기 게임이었다. 당연히 조엘 빌링즈 역시 그 게임을 해보고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TRPG]
(이미지 – http://whyeverythingsucks.com/episode-9-role-playing-games)

‘D&D’는 TRPG로 분류되는데, 이는 ‘Table Talk RPG’라는 의미이다. 여러 명이 같은 테이블에 모여 보드와 카드를 활용해서 게임을 진행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게임의 진행(마스터)을 맡는다. 그리고 게임 마스터는 현재 게이머들이 처한 상황을 말로 설명하며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진행자와 게이머가 따로 나뉘어서 테이블 위에 자신들의 카드와 말(캐릭터)을 움직여가며 상상을 기반으로 게임을 했던 것이다. 

RPG의 기원이 되는 ‘AD&D’ 룰에 관련 해서는 TSR Inc.이라는 회사가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다. SSI는 TSR과 해당 라이선스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협의를 마치고 1980년대부터 ‘AD&D’ 룰을 활용한 RPG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Pool of Radiance’와 ‘Dragon Lance’ 같은 게임들을 만들었다. ‘Pool of Radiance’는 SSI의 본격적인 ‘AD&D’ 시리즈에 시동을 거는 작품으로 회사 내부에서도 이 게임에 거는 기대가 아주 컸다.

[SSI – Pool of Radiance]
(이미지 – https://www.blackgate.com/2015/03/15/tsi-kickstarter-is-rebooting-the-ssi-gold-box-series/)

‘Pool of Radiance’는 출시 당시 Commodore 64/128, IBM PC, Apple II series 등 당시 주력 가정용(개인용) 컴퓨터 플랫폼으로 출시했을만큼 철저하게 PC시장을 공략한 작품으로 ‘Forgotten Realms’ 세계관을 기본으로 자신들의 RPG를 위해 새로 개발한 ‘Wizard's Crown’ 엔진을 사용하여 전투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었다. ‘Forgotten Realms’ 세계관은 ‘주시자의 눈’ 시리즈와 ‘발더스 게이트’ ‘네버윈터 나이츠’와 같은 유명한 게임에서도 참고로 하여 유명해진 세계관 설정이다.

[SSI – Gold Box Classics]
(이미지 – http://gbc.zorbus.net/)

‘Pool of Radiance’는 이동과 탐색 등의 지루한 진행 과정보다는 적과의 조우에 맞서 전투를 통한 육성에 중점을 두어 출시 당시에만 25만 카피 이상이 판매되어 SSI의 성공적인 RPG진출의 신호탄을 올리게 되었다. 원래 회사에 주력 제품이었던 워 게임 시리즈의 경우 ‘Wargame Construction Set’과 같은 경우가 5만 카피였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흥행이었고 이 제품의 박스 패키지가 금색 상자(Gold Box)로 디자인 되어 흥행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자 그 이후에 SSI의 ‘AD&D’ RPG들은 모두 금색 상자로 출시되어 ‘SSI’의 RPG하면 Gold Box를 연상시키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다.

[Pool of Radiance]
(이미지 – https://www.gamecover.com.br/2017/01/capa-advanced-dungeons-dragons-pool-of.html)

1980년대는 오리진 시스템즈의 ‘울티마(Ultima)’ 시리즈의 성공이 게임 세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해다. 그 이전까지 RPG는 TRPG를 의미했지만, ‘울티마’ 시리즈의 성공 이후 RPG는 컴퓨터 게임의 장르로 CRPG(Computer RPG)로 따로 분류되기도 했었다. TSR이라는 회사는 이 점을 주목하고 발 빠르게 움직여 라이선스 작업을 진행하였다. 1987년 TSR은 기존 ‘D&D’를 확장한 ‘AD&D’를 발표하였는데, SSI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TSR과 ‘AD&D’에 관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다. 

그 당시 TSR은 SSI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SSI는 5~7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에 워 게임을 개발한 실적이 있었고 회사의 대표 역시 열렬한 워 게임의 마니아였기에 이 점이 SSI 라는 작은 회사를 어필하는데 큰 이점이 됐다. 결국 TSR과 라이선스 협약에 성공하게 되고 SSI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새로운 발판을 위해 개발자도 7명에서 25명으로 대거 채용하면서 본격적인 RPG 개발을 시작하게 됐다.

불과 4년 이라는 기간 동안 무려 11개 이상의 ‘AD&D’ RPG를 출시하였으니 얼마나 미친 듯이 게임을 만들어댔는지, TSR에서도 자신들의 라이선스를 남용하다시피 하는 SSI와 관계가 틀어지게 됐다. 결국 1994년 이 두 회사는 결별해 SSI는 그 이후 ‘AD&D’ RPG들을 만들지 않게 됐다.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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