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홀 ‘배틀그라운드’ 성공이 한국 게임업계에 던지는 의미

이탈리아의 정치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이 죽어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오지 않는 상황”을 위기라고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온라인게임은 그람시의 말처럼 위기 속을 걸어왔다.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게임들은 모두 외산 게임이었고, 국산 게임들은 10여년 전 게임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온라인게임 종주국이라는 말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단지 인터넷 속도가 빠를 뿐이었다.

물론 국내 게임사들도 종종 새로운 게임을 선보이긴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단순히 시장 상황이 좋지 않거나, 너무 강력한 경쟁작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못만들어서 실패한 게임들이 쏟아졌다. 변화한 트렌드와 유저들의 눈높이를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어느 순간 “믿고 거르는 국산 겜”이라는 조롱 섞인 말은 유행어를 넘어 상식으로 자리잡아갔다. 유저들에게도, 업계에도 허무주의가 유령처럼 퍼져나갔다.

판교의 현직 게임 개발자들을 만나보면, 한국 게임사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은 해외에 비해서 아주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오는 게임들마다 왜 그 모양인가. 지난해 만난 한 교수는 “한국 게임사들은 이제 개발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올해 블루홀이 선보인 ‘플레이어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아주 높아서는 아니다. 오히려 게임 자체보다 그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게임은 30여명의 소규모 개발팀을 꾸려 약 1년 간 개발한 프로젝트였다. 내부에서도 성공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개발 도중 블루홀의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블루홀은 최근 2년간 연간 200억원이 넘는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수 년 동안 개발과 실패를 거듭해 온 탓이다. 블루홀은 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했지만 엔씨소프트나 넥슨, 넷마블 같은 자본력이 탄탄한 회사는 아니었다. 올해 초가 되자 회사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자금 사정이 악화되면서 임원들의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봄 블루홀의 경영진들은, 진지하게 회사의 매각을 고민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회사의 매각은 현실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스팀에서 ‘배틀그라운드’가 기적처럼 흥행을 달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 회사가 넘어갔다면 블루홀의 모습, 그리고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게임의 성공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블루홀은 새로운 투자를 받기도 쉽지 않았다. ‘배틀그라운드’의 개발을 이끈 김창한 PD는 17년간 게임을 개발해왔음에도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어, 본인 스스로 “실패만 거듭해온 개발자”라고 말한다. 히트작이 없으니 경영진에 기획안을 내더라도 통과가 쉽지 않았다. 채용을 하려해도 지원하는 개발자가 없어 외국인들을 고용해 게임을 만들었다. 그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는 게임이 ‘배틀그라운드’다. 지금 그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개발자 중 한 사람이 됐다.

한 게임사 대표는 “블루홀이기에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패키지 판매를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다른 게임사들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방식이다. 차라리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모바일게임 하나라도 더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슬프게도, 어느 순간부터 한국 게임업계는 게임이 추구하는 가치보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세계로 바뀌었다. 개발자들이 아무리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해도, 먹고 사는 문제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이는 경영진도 마찬가지다.

마치 영화 ‘남한산성’의 인조와 신하들처럼, 일단 살아남고 보는 것이 이 업계의 지상 과제가 돼버렸다. 당장 쌀과 가마니가 떨어졌는데 사대부의 명분을 생각할 병사들이 있을까.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이 주목 받는 이유는, 구성원들이 그렇게 힘든 상황을 결국 이겨냈기 때문일 것이다.

곧 2018년이다. 올해 상장으로 축포를 터뜨린 게임사들도 있고, ‘배틀그라운드’처럼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게임도 있다. 하지만 몇몇 중소 게임사들은 폐업했고, 많은 개발자들이 직장을 잃었다.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느닷없이 프로젝트가 망한 게임도 여럿이다. 결과가 어찌됐든 모두 수고했고, 고생 많으셨다고 말하고 싶다. 업계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모두 힘을 내었으면 한다. 2018년에는 더 새로운 게임, 더 도전적인 게임으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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