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골 중년 아저씨가 주인공… 시에라온라인의 파격 도전
게임별곡 시즌2 [시에라온라인 번외편4]
지금까지 소개한 시에라온라인의 게임 시리즈들은 가족들이 모여서 하기에 크게 문제가 없는 게임들이었지만, 가족간의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였는지 문제가 되는 게임도 하나 만들었다. 바로 ‘래리(Leisure Suit Larry Series)’ 시리즈로, 무려 1987년이라는 30년도 넘은 오래 전에 발매한 본격 ‘성인용 코미디 어드벤처’ 장르를 표방한 게임이다.
앨 로(Al Lowe)가 주축이 되어 개발한 성인용 게임 ‘래리’의 주인공은 왕이나 기사, 자연을 보호하는 정의감에 넘치는 소년 따위가 아니라 색골 중년의 아저씨 래리다. 기존 시에라온라인의 게임을 접한 분들이라면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사실 시에라온라인은 회사 설립 초기에 ‘소프트 포르노 어드벤처(SOFTPORN ADVENTURE)’라는 다소 의외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제목에 ‘PORN(포르노)’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지만, 표지나 광고 사진만 보고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분명 실망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 게임은 Apple II, Atari 8비트, DOS용으로 개발된 것으로, 텍스트를 입력해 명령하는 방식의 게임이다. 1981년은 본격적인 시각적 만족을 위한 이미지 처리는 많이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래리’의 개발자 앨 로는 ‘래리’의 캐릭터를 디자인할 때 실제로 사내에 있던 ‘제리’라는 영업부 직원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래리와 같은 사람이 실제한다니). 래리의 외모나 발언 등의 수위를 보았을 때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글자로만 보던 어른들의 세상을 그림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던지, ‘래리’는 출시 당시 30년 전 미국에서조차 많은 논란이 있던 게임이다. 하지만, 만들었다 하면 6편 정도는 기본으로 시리즈화하는 시에라온라인 특유의 뚝심(?) 덕분에 ‘래리’ 시리즈 역시 성인용이라는 다소 한정된 계층의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7편까지 발매되었다(중간에 4편은 취소되었고 바로 5편 출시).
[역대 래리 시리즈]
래리 1 / Leisure Suit Larry in the Land of the Lounge Lizards (1987, 1991 리메이크)
래리 2 / Leisure Suit Larry Goes Looking for Love (in Several Wrong Places) (1988)
래리 3 / Leisure Suit Larry III: Passionate Patti in Pursuit of the Pulsating Pectorals (1989)
래리 4 / Leisure Suit Larry 4: The Missing Floppies (취소)
래리 5 / Leisure Suit Larry 5: Passionate Patti Does a Little Undercover Work (1991)
래리 6 / Leisure Suit Larry 6: Shape Up or Slip Out! (1993)
래리 7 / Leisure Suit Larry: Love for Sail! (1996)
2013년에는 정식 넘버링 외에 ‘래리 리로디드(Leisure Suit Larry: Reloded)’라는 게임도 출시됐다. 시에라온라인의 인수합병 과정에서 대거 해고된 직원들 중 래리 시리즈에 참여했던 개발팀들이 리플레이 게임즈(Replay Games)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크라우딩 펀드로 자금을 모아 개발했던 게임이다.
‘래리’ 시리즈의 놀라운 점은 한국에서도 정식발매가 됐다는 점이다! 그 당시 동서게임채널이라는 유통사에서 정식 발매했던 ‘래리’ 시리즈는 중학생이던 필자가 실물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게임이었다(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니!).
지금도 게임 콘텐츠는 애들이나 하는 것이지 다 큰 어른이 아직도 게임을 하냐는 지탄을 하는 인식이 남아있는 세상인데, 당시에는 더하면 더했지 지금보다 덜하지는 않은 세상이었다. 엄격한 사회 규정과 예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 질서 속에 살아가던 필자와 같은 중학생에게는 당연히 어른들은 하지 않아야 될 것 같은 ‘게임’이라는 것이 ‘성인용’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게임 판매 대리점에 비치되어 있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끝내 집에서 몰래 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성인이 되어 실제로 ‘래리’를 플레이 해보고 나서 느낀 감흥은 기대했던 것(?) 만큼 못미쳤다. 워낙 더 심하고 강한 자극적인 콘텐츠가 눈에 익어버린 상태에서 접하는 ‘래리’는 오히려 유아용의 콘텐츠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소프트하다(그렇다고 지금 유아들이 즐길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 게임은 시각적인 부분보다는 여전히 텍스트 위주의 대사 내용 안에 어른스러움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영어에 익숙하지 않거나 북미권에 거주하는 성인들이 아닌 이상 게임을 진행하면서 뭔가 큰 감흥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북미권을 제외한 국가, 특히 한국과 같은 곳에서는 크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었다. 몇 몇 선도적인 친구들이 해봤을 뿐 당시에 너도 나도 즐겨 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북미권에 사는 어른들은 꽤나 재미있게 했는지 지금도 이 게임을 기억하는 미국 아저씨들이 많다(물론 한국 아저씨들도 많다).
한국은 아직까지도 청소년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에도 선정성을 논할 만큼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른들이 즐길만한 컨텐츠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다양한 문화 활동에 제한적인 부분이 많다. 아마도 한국에서 당분간 이런 류의 게임이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 필자의 잡소리
시리즈 초기에 초절정 루저남 ‘래리’가 가장 마음을 두고 있고 있던 그녀 ‘패티’가 시리즈 말미에 갑자기 사라져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다면 시리즈를 직접 즐겨보시기 바란다.
이 게임의 개발자였던 엘 로는 원래 학교 음악 선생님이었다.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해서 게임 개발자가 되었는데, 시에라온라인에서 뜬금없이 성인용 게임 ‘래리’ 시리즈를 개발해 일약 스타 개발자로 거듭나게 된다.
엘 로는 평생을 ‘래리’와 함께 살았다. 2013년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새로운 래리 시리즈를 개발했을 만큼 그의 인생은 ‘래리’의 인생 그 자체이다. 게임이 출시될 때 마다 자신을 캐릭터화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살았지만, 비뚤어진 성의식에 사로잡힌 남성(같은 회사 내에 ‘제리’)을 풍자하고 싶었다고 밝혔듯이 엘 로 본인의 성관념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하지만 게임 내내 뭔가 짠하고 웃음 뒤에도 여운이 남는 것을 보면 캐릭터에 많은 정을 들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아직까지도 엘 로는 ‘래리’ 시리즈를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VR/AR 매체로 거듭나는 ‘래리’를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