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흥행 성공한 세가의 오락실 게임들을 개발한 스즈키 유

게임별곡 시즌2 [세가 중(中)편] 세가를 바꾸어 놓은 사람, 스즈키 유

[필자는 이 풍경에 반해 제주도로 이사 왔다.. 는 개뻥]

 

전편은 ‘세가(SEGA)’라는 회사의 비즈니스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다면(조금 재미없었다). 이번 편에서는 흥행에 성공하며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은 세가의 게임을 위주로 써 볼 생각이다. 물론, ‘세가’의 모든 게임을 전부 다루기에는 필자의 체력과 지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편에서 ‘나카 유지’의 ‘소닉’ 위주의 내용으로 쓰여진 만큼 이번 편에서는 그의 스승이자 ‘세가’의 초기 사업 진행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스즈키 유’와 그가 개발한 게임 위주의 내용으로 글을 써보겠다.

전편(세가 상편)에서 ‘소닉’을 만들어내고 ‘소닉’이라는 캐릭터 하나로 세가를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자리 잡게 한 나카 유지가 세가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스즈키 유는 ‘세가(SEGA)’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하다(필자 혼자만의 생각이다).

‘소닉’이라는 캐릭터나 게임과 더불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세가의 게임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버추어 파이터(이하 버파)’를 꼽는다. 필자 인생에서 가장 많은 동전을 투입 한 게임이 ‘버파’였고, 군 제대 후 신림동 고시촌에 살 때도 퇴근 이후에는 홀로 고시원 앞에 오락실에서 ‘버파 3TB’를 하곤 했다.

물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사실 ‘버파’보다는 ‘태켄(철권)’이라는 게임이 흥행면에서는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아직도 동네 오락실이나 극장 오락실을 보면 ‘태켄’은 있어도 ‘버파’를 갖춘 곳은 거의 찾기 힘들다.

하지만, 필자는 둘 중에 하나라면 역시 ‘버파’를 꼽는다. (제발 극장 오락실에 버파 좀 갖다 놔 달라고요!) 필자에게 ‘버파’라는 게임을 중독시킨 친구 둘이 있는데(민석이와 진우) 이 놈들 역시 엄청나게 많은 동전을 필자와 함께 세가에 갖다 바쳤다. 필자와 친구 둘 그렇게 세 명이 그 동안 ‘버파’에 쏟아 부은 돈만 모아도 사실 작은 건물 하나 살 정도일지 모른다. 한 판에 300원 하던 시절부터 하루에도 몇 천원 ~ 몇 만원까지 정신 없이 쏟아 붓기를 십 몇 년을 줄기차게 해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제정신이 아닌 놈들인 것 같다).

나중에 호화로운 저택을 짓게 된다면 꼭 방 하나에는 ‘버파’ 게임기를 갖다 놓고 싶어할 만큼 아직도 애정이 많은 게임인데, 이렇게 최소한 세 사람의 가정 경제를 파탄의 지경까지 몰고 간 게임을 개발한 사람이 스즈키 유라는 천재 프로그래머다.

[그나마 머리 숱 많던 시절 사진으로 골랐습니다.]

 

물론 그는 명작으로는 불리지만 흥행에는 참패한 ‘쉔무’ 게임으로 수백억의 개발비를 날려버리고 결국에는 세가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며,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의 철수를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로 인해 좌천을 당하는 등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의 업적은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IAS)에 동양인으로는 세 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도 영향력이 지대한 인물이다.

‘소닉’의 개발자 나카 유지가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게임을 접하면서 게임 개발자의 꿈을 키웠던 것과는 달리, 스즈키 유의 경우 나이가 나이인 만큼(1958년 6월 10일, 이와테 현 카마이市 출생)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게임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실제로도 그는 대학교에 진학해서야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물건을 접했는데, 대학 시절 접한 컴퓨터에서 ‘아타리’의 ‘퐁(PONG)’이라는 게임을 시작으로 이렇게 멋진 것을 나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우게 된다. 고졸의 나카 유지와 달리 스즈키 유는 대학 졸업 후(오카와마 공과 대학, 전자공학 전공) 세가에 프로그래머로 입사하게 된다.

1982년 스즈키 유가 입사하던 때만 하더라도 세가는 지금처럼 게임회사로 인식되기 보다는 주크박스와 같은 하드웨어 중심의 회사였다. 또 스즈키 유 역시 게임을 만들어보자는 포부로 입사했다기보다는 유년 시절부터 미술이나 음악, 서예에 관심과 흥미가 많았기 때문에 음악기기 관련 사업을 하던 세가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 ‘행온’ (1985) : 세계최초의 체험형 게임기의 등장

공식 기록에 의하면 세가는 스즈키 유가 입사하고 1년이나 지난 1983년에서야 8비트 가정용 게임기 ‘SG-1000’으로 게임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물론 스즈키 유에 의해 사업 영역이 바뀐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1985년 출시한 ‘행온(Hang On)’이라는 게임이 없었다면 세가의 적극적인 게임 사업으로의 확장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게임 사업과는 다른 아예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스즈키 유 자기만의 욕심으로 게임을 개발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이 게임은 그야말로 게임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지니며 그 당시 오락실(아케이드 센터)의 풍경을 바꾸어놓게 된다.

[꼭 저 간판에 충돌하고 날아간 경험 한 두 번쯤 있지 않으신지?]

 

세계 최초의 체험형 아케이드 머신으로 불리는 이 게임은 스즈키 유 자신이 오토바이나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고, 신입사원이었던 주제에 페라리를 몰고 다니던 건방진 신입이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게임이었다.

회사 내부에서 늘 ‘신입 사원 주제에’ 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며 입사 초기 그에 대한 고위관직님들의 평가는 좋지 않았지만, 이 게임 하나로 그에 대한 평가는 손바닥 뒤집듯이 뒤바뀌게 된다. 세가의 경영진은 ‘이 놈 돈 좀 되겠구나!’라는 속마음을 조금 더 어른스럽고 품격 있게 포장하여 세가의 기술력을 총 집결시켜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발팀을 조직한다. ‘세가의 새로운 업무 확장 영역에 힘을 써달라’는 명목으로 조직된 전설의 ‘AM2(AM R&D DEP.T#2,)’라는 기술개발연구소(스튜디오)가 그것이다.

이렇게 조직된 ‘AM2’는 그 이전 개발팀의 ‘행온’을 시작으로 ‘버추어 파이터’로 전성기를 누리다가 ‘쉔무’로 막을 내리게 된다. ‘쉔무’의 경우 개발비만 70억엔이 들어간 대작 프로젝트였던 것은 맞지만, ‘그런 프로젝트 하나 망한 것이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재무구조가 열악한 회사였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쉔무’의 흥행참패는 회사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고, 결국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완전 철수하게 한 것은 확실하다.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을 철수 한 것이지 게임 사업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님).

[AM2(AM R&D DEP.T#2,)]

 

2000년 초반 필자에게 세가의 ‘AM2’는 세가 그 자체였다고 할 만큼 많은 영향을 끼친 개발팀이었고, 1985년 12월에 출시한 ‘스페이스 해리어’와’ 그 다음 해 ‘아웃런’을 시작으로 ‘애프터버너’까지 체험형 게임의 왕좌로 거듭나게 된다.

[스페이스 해리어 (1985년 12월) – 불행히도 필자 동네 오락실에는 없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technobuffalo.com/reviews/3d-space-harrier-mini-review/)

 

비슷한 시기에 나온 ‘스페이스 해리어’의 경우 필자가 사는 촌구석 동네 오락실에는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해 본 적은 없다. 지금도 구하기는 쉽지 않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 시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즐겨보지 못한 것이 정말 한이 된다. (요즘은 유투브에서 동영상으로만 플레이하는 장면을 감상하고 있다).

 

■ ‘아웃런’ (1986) : 페라리를 타고 달려보자!

전작 ‘행온’ 1985년 출시에 이어 다음 해인 1986년 9월 20일에는 페라리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체험형 게임이 등장했다. 어린 시절 유명했던 이 게임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니셜D’ 게임이 더 유명하지만, 그 시절 면허증 없이 합법적으로 차를 몰고 질주하는(느낌만) 방법은 이 게임을 즐기는 것 외에는 없었다. (스즈키 유가 당시 페라리를 몰고 회사에 출근을 했었는데, 게임에 등장하는 차량도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했던 것 같다).

[필자는 이 풍경에 반해 제주도로 이사 왔다.. 는 개뻥2]

 

대부분의 체험형 게임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고질병 중에 하나겠지만, 이 게임도 워낙 많이들 하고 또 목숨과 직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안이함 때문에 과격한 운전 스킬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핸들이 제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요즘 오락실에는 ‘이니셜D’ 게임기가 있는 곳들이 있는데, 이 게임도 핸들이 틀어지거나 페달이 덜렁거리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총 쏘는 게임들도 하도 발광 사격을 해대서 총 센서가 고장 났거나 상부 슬라이드가 덜렁덜렁 거리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하드웨어 조작장치의 평균고장수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 게임의 시초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게임은 ‘GTA’처럼 ‘내가 지금 뭔가 자유와 방종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었나?’ 싶으면 경찰차가 추격 해 온다던가(역시 넘었구나!) ‘Death Track’ 처럼 청부의뢰를 받아 누군가의 차량을 전복시키거나 날려버리는 인의예지에 어긋나는 임무를 할당해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게임 전체적인 느낌은 상당히 박력 있고 스릴이 넘친다.

이 시절 스즈키 유의 체험형 게임들의 공통점이 비슷한 장르의 다른 어떤 게임들보다도 상당히 박력 있는 연출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 게임 역시 상당한 속도감의 화면 처리를 통해 ‘진짜 내가 차를 타고 달리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전달해주는데, 단순히 시작적으로만 전달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와 비슷한 조작감을 느낄 수 있도록 게임기(하드웨어) 측면에서 지원했다. 그래서 아주 약간의 상상력만 더 하면 실제와 같은 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 시절 얘기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눈이 높아져서..)

[골든 조이스틱 어워드 – 2016년에 34회째를 맞이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gamesradar.com)

 

당연히 이 게임은 출시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결국 유명 게임 포럼인 ‘Games Radar’에서 그 해의 최고의 게임을 선정하는 ‘골든 조이스틱 어워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역대 선정작들을 살펴보면 1984년 ‘Knight Lore’를 시작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2’나 ‘둠3’, ‘폴아웃 3’, ‘엘더스크롤 5’ 등 게임을 조금 한다 하는 분들이라면 다 알만한 대작들이 선정되었다. (보통 투표에는 일반 게이머들도 참가하는데 그 수가 무려 200만 명이 넘기도 한다).

참고로 ‘아웃런’ 게임은 게임별곡 시즌1에서도 [게임별곡 69] 초기 체험형 자동차 게임 ‘아웃런’ 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다룬 적이 있다.

(기사 링크 : http://gametoc.hankyung.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08)

 

■ ‘애프터버너’ (1987) : 이제는 하늘이다!

오토바이(‘행온’)와 자동차(‘아웃런’)로 지상을 평정하고 이제 남은 건 하늘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세가’는 연속해서 다음 체험형 게임으로 ‘애프터버너’를 출시 했다. 필자가 어린 시절 대전의 홍명상가 꼭대기 층에 있는 오락실에서 자주 했던 체험형 게임이 바로 ‘애프터버너’라는 게임이었다.

이 게임이 인기를 끌게 된 배경에는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애니메이션 ‘에어리어88(국내 방영명: 지옥의 외인부대)’과 영화 ‘탑건’도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꼭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 게임은 인기를 끌만한 게임이었다).

게다가 필자에게 이 게임이 특별했던 이유는 제일 좋아하는 전투기가 미 해군의 ‘F14 TOMCAT’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애프터버너’라는 게임은 필자에게 악마의 종합선물 세트 같은 것이었고, 영혼을 팔아서라도 동전을 구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게임이었다. (아.. 내 영혼)

[이게 막 좌우로 움직인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C182sKs2CQQ)

 

다만, 원래 이 게임은 보급판(일반형)과 체험형(시뮬레이터형)이 있었는데, 필자 동네의 오락실은 비교적 영세한 사업장이었던 것인지 일반형 기기만 있었다는 것이다(서울에는 체험형 버전도 있었다고 하던데). 

하지만, 이 일반형도 어디까지나 체험형 시뮬레이터 버전에 비교해서 일반형이라는 것이지 기존의 오락실에 있던 스틱과 버튼만 있는 다른 오락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장래 희망이 전투기 파일럿이었던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유일하게 대리만족과 유사체험을 즐길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체험 수단이기도 했다.

필자에게 있어 이 게임은 이미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미래 직종에 대한 부푼 꿈과 기대를 달래주는 꿈의 머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파일럿의 꿈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 때는 실사 버금가는 느낌이었는데..]

 

필자가 세가라는 회사를 접하게 된 계기는 가정용 콘솔 게임기가 아니라 시내 오락실이었다. 그 때의 충격이란 지금 같은 시절의 VR/AR(가상현실/증강현실)에 버금가는 시각적, 체험적 충격이상의 것이었다. 게다가 전투기 파일럿이라는 간절한 장래희망을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보니 점점 시내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필자가 주로 가던 시내의 오락실은 당시 대전역 근처였다(필자가 살던 조그만 동네에는 이 기계가 없었다). 당시 ‘탑건’의 주인공 ‘매버릭’ 같은 기분으로 스틱을 빠르게 좌로 우로 두 번 휙휙 돌리면 기체가 선회 기동을 펼쳤다. 지금 보면 단순한 패턴의 동작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보다 더 현실감있는 공중기동을 체험할 수단은 사실 이 게임 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게임이 나오기 전부터 필자는 프라모델을 접하고 주로 전투기를 만들면서 푸르른 창공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는데, 관련된 게임이나 영화는 무조건 수집하고 보고 또 보고 프라모델 역시 주로 ‘F-14 TOMCAT’ 모델을 수집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아카데미로 시작해서 결국 ‘타미야’까지 손을 댔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모델은 ‘졸리 로저스’ 비행대 모델이었다.

[1:48 타미야 Grumman F-14A Tomcat Model Kit]

 

당연히 관련된 영화도 빠지지 않고 관람했는데, 그 당시 비디오로 본 영화 ‘Final Countdown’은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진주만으로 타임슬립을 해서 일본군의 프로펠러 ‘제로’기와 공중전을 벌인다는 엄청나게 허황되고 막무가내 식의 내용이지만, 등장하는 기체와 비행대 마크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영화 : The Final Countdown (1980년 8월 1일 개봉)]

 

이 정도만 얘기해도 필자가 얼마나 ‘F-14 TOMCAT’에 빠져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렇게 한참 꿈 많고 망상에 빠져 살던 시절에 ‘애프터버너’라는 게임을 보았으니 제정신이 아닌 게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비록 ‘비행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갖다 붙이기에는 여러 부분에서 사실성이 한참이나 부족하고 과장된 아케이드(액션) 게임이지만, 원래 그러라고 만든 게임이 아니던가? 비행 감각이나 데이터의 사실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단순히 비행을 하는 순간의 체험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게임이기 때문에 미사일이 몇 십 발씩 달려있어도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PC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비록 물리적인 공식이나 전자장비 들의 사실적인 작동 표현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해도 내가 지금 뭔가를 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은 거의 받을 수 없는 것에 비해 이 게임은 뭐 어찌됐든 뭔가를 타고 내가 지금 하늘을 날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으니까.

좌우로 재빠른 선회기동을 펼치며 음속으로 날아드는 미사일을 회피하면 필자도 모르게 ‘예~!!’ 하면서 한 손으로 주먹을 쥐며 소리를 쳤고,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오~ 하는 감탄의 인사를 건네주던 그 시절 아직은 오락실에도 기사도가 살아 있는 훈훈한 시절이었다. (사실은 이 게임이 너무 비싸서 맘 내키는 대로 돈을 뿌리듯이 하기는 좀 그렇고 남들이 하면 구경이나 좀 해보자 하는 분들도 많았다).

[영화 탑건(TOP-GUN) – 1986년]

 

게임 출시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탑건’ 역시 그 인기가 굉장했었다. 필자도 이 영화를 수 십 번이나 보았다. (사실 지금도 기사를 쓰다 말고 다시 ‘탑건’을 또 보고 있는 중이다. 이번으로 한 87번째 보는 거 같다).

이 영화도 따지고 보면 등장하는 적기도 실제와 다른 기체가 등장하는 등(정치적인 이유였지만) 사실성에 기반해서 철저하게 고증에 충실한 영화라기보다는 ‘F-14 TOMCAT’을 몰고 다니는 젊은 전투기 조종사들의 우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치 게임으로 치면 ‘애프터버너’같이 극사실적인 표현에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는 무언가 대중이 환호할만한 재미적인 요소에 집중했다. (그래서 ‘탑건’은 오락영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나저나 ‘탑건2’ 나온다던 소문은 어떻게 된 겁니까?)

필자가 ‘애프터버너’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어린 시절 추억을 구구절절 쓰는 이유는 이것이 세가의 정책적인 부분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필자처럼 전투기 파일럿을 꿈꾸는 아이들은 필자 혼자만이 아니었다. (물론 아닌 친구들도 많았겠지만) 당시 비디오 게임의 원산지(텃밭)라고 볼 수 있는 북미 시장을 장악하고 싶었던 세가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체험형 게임으로 지상의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떠나 이제 하늘로 날아오를 차례였는데, 마땅한 대상을 물색한 것이 바로 ‘F-14 TOMCAT’ 이었다.

당시에 미 해군은 물론 미국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가 ‘F-14 TOMCAT’이라는 전투기였다. 이 기체는 디자인적인 면에서도 성능적인 면에서도 그리고 날개가 뒤로 접혔다 펴졌다 하는 가변익을 채택한 부분이나 동시에 6기의 적기를 동시 추적, 동시 공격이 가능한 레이더 시스템과 동시 공격에 사용되는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인 ‘피닉스’미사일의 탑재 등 일반 대중에게는 굉장히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미군 역시 이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영화지원에도 적극적이어서 1980~1990년대 나온 영화나 애니메이션 중에는 ‘F-14 TOMCAT’이 조연,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꽤 많았다.

[Dan Kitchen's Tomcat: The F-14 Fighter Simulator (1989)]

 

여담이지만, 당시 ‘탑건’을 홍보하면서 영화에 등장하는 ‘F-14’ 전투기를 소개할 때 ‘서울 상공에서 피닉스 미사일을 발사하면 평양 상공의 미그기를 격추시킨다!’는 내용의 소개자료도 있었다.

이렇게 자타공인 미 해군의 주력 함대방공을 목적으로 정치/군사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주력병기 중에 하나였으니 그 당시에 전 세계에서 ‘F-14 TOMCAT’을 모르는 친구는 별로 없었을 듯 하다. 워낙 유명한 전투기이기 때문에 이름은 몰라도 생긴 모양을 보면 ‘아~ 이 비행기’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다른 수 많은 전투기가 있었는데 굳이 ‘F-14 TOMCAT’을 선정한 이유도 이렇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전 세계적으로도 ‘F-14 TOMCAT’이라는 함대방공용 미 해군 전투기는 이미 유명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 같다.

 

■ 이제는 3D 시대

이렇게 체험형 게임으로 아케이드 시장을 장악해 가던 세가의 스즈키 유는 그 외에도 수십 개의 게임을 개발 및 총괄했는데, 1980년대 체험형 게임 개발을 성공한 이후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바로 체험형 게임에서 3D 게임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물론 체험형 게임들의 화면을 보면 마치 3D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 개발론적인 부분에서 보자면 냉정하게 말해서 진짜 3D라기 보다는 스프라이트 확대/축소 기법을 사용한 가짜 3D 기술이었다(겉으로 보기에만 3D처럼 보이는 화면). 스즈키 유 스스로도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게임으로 표현할 수단은 3D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MODEL 1의 성능 테스트를 위한 테스트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게임이 의외로 완성도가 높아서 그대로 상용버전으로 출시됐던 ‘버추어레이싱’을 시작으로, ‘버추어파이터’, ‘버추어캅’으로 이어지는 ‘버추어’ 시리즈의 3D 게임들이 본격적으로 개발 되었다.

[‘버추어레이싱’ (1992)]

 

다음 편에서는 본격적인 세가의 3D 게임 도전기와 그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들에 대해서 써보도록 하겠다.

 

■ 필자의 잡소리

이번에도 ‘상/하편이면 되겠지’ 하던 대충적인 감각의 분량 예상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느낀 한 주였다. 결국 ‘세가’편은 상/중/하편으로 나뉘어 다음 주 예정인 (하)편에서는 세가의 본격적인 3D 게임 개발에 얽힌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게임별곡 시즌2를 애독해 주시는 애독자 분들이 은근히 많은 것 같다. 최근에는 필자의 지인 중에 ‘낌찌’라는 예명을 쓰는 지인에게서 왜 ‘세가타 산시로’편은 다루지 않느냐고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전편을 잘 읽어보면 세가타 산시로 얘기를 짧게나마 분명히 했다. 세가타 산시로 편은 아마 따로 특집기사로 다뤄야 할 것 같다.

세가 (중)편을 끝내며..

굴곡 많고 험난한(?) 인생을 걸어가는 것 같지만, 전 세계에 그 영향력을 끼친 게임업계에 공로자 이자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스즈키 유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실패한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실패했다고 해서 내일도 모레도 계속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게임 개발이라는 것은 대부분 실패의 연속입니다. 실패가 거듭되다가 포기하기 직전 성공하는 것이죠.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붑니다. 그런 것이 성공의 바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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