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별곡 시즌2 [1회 하] ‘게임보이’로 휴대용 전자 게임기 역사 바꾸다

[요코이 군페이. 사진 출처http://www.diadegamer.com ]

게임별곡 시즌2 [1회 닌텐도 하] ‘게임보이’로 휴대용 전자게임기 역사를 바꾼 요코이 군페이

전편에서 지금의 닌텐도를 있게 한 창업주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内房治郎)와 닌텐도를 세계적인 게임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창업주의 손자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 3대 사장, 그리고 명작 게임 개발을 통해 닌텐도의 마스코트 ‘마리오’를 탄생시키고 ‘젤다의 전설’ 시리즈로 전 세계에 닌텐도의 위상을 드높인 미야모토 시게루(宮本茂)까지 닌텐도라는 회사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빼놓으면 안 되는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다. 이 분을 빼놓으면 섭섭해 할 것 같은데 그의 이름은 바로 닌텐도 '휴대용 게임기의 신' 요코이 군페이(横井軍平)다.

■ 닌텐도의 일등공신 요코이 군페이...대용 전자 게임기 역사를 바꾸다

보통 게임 좀 한다 하는 분들에게 닌텐도를 얘기할 때 미야모토 시게루 정도는 많이 아는데, 요코이 군페이를 얘기하면 잘 모르는 분들도 있다. 골수 게임 관계자가 아닌 이상 의외로 그를 잘 모르는 분들도 많다. 이는 보통 ‘마리오’나 ‘젤다의 전설’ 시리즈 게임으로 닌텐도를 접한 분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뭔가 은둔형 스타일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요코이 군페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어도 닌텐도의 전설적인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를 아는 분들은 많을 것이다. 이렇게 휴대용 전자 게임기 역사를 바꾼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요코이 군페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게임보이’를 개발하기 이전에 이미 휴대용 게임기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1980년에 ‘게임&워치’를 통해 세계 최초의 휴대용 (전자)게임기 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마치 음악산업에 있어서 기존에 집안에 있던 커다란 전축에서만 음악을 듣다가 밖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들고 다니는 미니 카세트가 발명된 것과 같은 정도의 매우 놀랍고 혁명적인 일이었다(지금은 당연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길거리에서 주머니에 넣은 기기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엄밀히 얘기하면 세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는 ‘게임&워치’가 출시되기 이미 4년 전인 1976년에 ‘마텔’이라는 업체에서 출시한 ‘마텔 오토 레이스’라는 게임기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휴대용 게임기라는 인식과 함께 인기를 얻은 것은 ‘게임&워치’였기에 많은 자료에서 세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를 ‘게임&워치’로 인정하고 있다.

[진짜 세계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 Mattel Electronics Auto Race](이미지=유튜브 소개 영상)


휴대용 게임기가 나오기 전에는 ‘게임’이라는 것은 아케이드 센터(오락실)를 가거나 TV에 연
결된 기계를 통해서 집안에서 즐기는 것이었다. 이것을 손에 들고 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신통한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전자기적 게임기들은 ‘최초’라는 수식어는 달았지만, 뭔가 게임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느낌으로 우리는 이런 것도 전기를 통해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라고 보여주는 정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기해 하다가도 몰입해서 할 만큼의 끌어당기는 매력은 없었다.

물론 이건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고 저런 류의 게임기들은 미국 등지에서 최근까지도 판매하고 나름대로의 장르를 구축하며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아직까지 그런 동네가 아직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기도 인터넷도 안 들어오는 동네에서는 유일한 전자기적 놀이기구이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마텔’의 ‘오토 레이스’라는 게임은 전자기적 장치라도 있었지, 그 이전에는 태엽을 감아서 움직이는 자동차 게임들도 많았고, 실제로 1980년대만 해도 이런 게임기들이 제법 많았지만, 그 당시에는 게임기라는 분류보다는 ‘장난감(완구)’라는 분류로 시장에 유통됐었다. 태엽을 감으면 직~직~ 하고 자동차가 움직이면서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일품이었다.

태엽을 감아서 레이스를 하는 자동차 게임 말고도 야구 게임도 있었는데, 하도 오래 되어서 어떻게 갖고 놀았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뭔가 버튼을 막 누르면 홈런도 뜨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렇게 아날로그적인 기계 장치를 갖고 놀던 시절에 갑자기 나타난 전자 게임기는 엄청나게 놀랍고 보면 볼수록 신기한 물건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행하던 장난감 중에는 용수철(스프링)이 있었는데, 여러 겹의 스프링이 모아졌다 벌어졌다 하면서 계단을 기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었다. 그때는 아직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뭐 이렇게 ‘치기’가 많아) 놀이나 땅에 그림을 그리고 노는 ‘오징어’나 말뚝박기 게임과 디지털 게임기가 마구 공존하던 아날로그 디지털의 융/복합 시기였다.

■ 진정한 (전자)포터블 게임기의 등장

하지만, 초기의 휴대용 전자 게임기는 제약사항이 많았다. 게임기 기계 한 대에는 1개의 게임만 들어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는 제조상 기술의 한계로 게임기의 액정과 게임에 쓰이는 그림이 결합되어 대부분의 게임들이 단순 반복적인 패턴을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휴대용 게임기들을 기울여 가면서 잘 들여다보면 액정 뒷면에 게임에 나오는 배경이나 캐릭터들이 흐릿하게 보이기도 했다. 아니면 컬러가 입혀진 배경은 아예 액정 위에 그림으로 그려서 나오기도 했다. 게임기의 전원을 켜면 흐리게 보이던 그림이 진하게 보이면서 정해진 패턴으로만 움직이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에 반해 ‘게임보이’는 이런 휴대용 게임기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여 게임 팩(카트리지)을 교체하면 새로운 게임을 할 수 있고 액정 역시 미리 정해진 그림만 표시할 수 있는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 원하는 그림을 모두 표현할 수 있도록 변경되어 사실상 게임 시스템적인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이미지= https://en.wikipedia.org/wiki/Game_%26_Watch)

 

필자가 처음 ‘게임보이’를 실물로 본 것은 중학교 때의 일이다. 반에서 제일 부자였던 친구가(정확히는 친구의 아버지가 부자) 이 게임기를 들고 학교에 가져와서 자랑을 하는데, 필자가 갖고 있던 휴대용 게임기(그 당시 1만2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삼)에 비해 너무나 차이 나는 기술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필자가 갖고 있던 주먹만한 게임기는 지금은 그 이름도 생각 안 나는 단순한 비행기 슈팅 게임이었는데(1992년인가 대전 태평동의 ‘삼부프라자’에서 샀음),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이동하면서 총알을 쏘는 기능만 있었다. 이동은 좌에서 우까지 전부 5칸을 이동할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적기를 맞히거나 적기가 쏜 총알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중간 중간에 보스 같은 놈이 나오긴 했지만, 정해진 패턴은 이게 전부였다. 비록 실험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120년을 계속 해도 그랬을 것이다.

기존의 휴대용 게임기들이 그렇게 멍청이 같이 똑같은 패턴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태생의 한계 때문이다. 본체에 쓰인 기술 자체가 기존의 전자계산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자계산기는 지금도 생산되어 많은 분들이 주판대신 유용하게 쓰고 있지만, 정해진 숫자와 기호 외에는 액정에 표시할 수 없게 되어있고 숫자를 누르면서 잘 살펴보면 알겠지만, 액정에 이미 흐릿하게 숫자를 표시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전자 시계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초기의 휴대용 게임기들은 기존에 전자계산기에 쓰이던 흑백액정에 버튼을 추가한 것이 전부다. 그래서 전혀 다른 내용의 게임을 개발하려면 기계 자체도 새롭게 만들어야만 했는데, ‘게임보이’가 최초로 동일한 기계로 팩(카트리지)만 교환하면 여러 종류의 게임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휴대용 전자 게임기가 된 것이다.

물론 기술이 진보한 부분에서는 굉장히 환호할만한 일이었지만, 반대로 전력소비는 엄청나서 기존의 단순한 휴대용 게임기가 전자 시계에 쓰이던 수은 전지 하나로도 몇 달을 버티는 것에 비해 ‘게임보이’는 일반 건전지를 4개나 집어넣고도 하루 종일 붙들고 놀면 2~3일 이상을 버텨내질 못했다(너무 기대가 과했던 것인가?). 하지만,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워크맨’과 ‘미니카’ 열풍 덕분에 일반 건전지 대신 충전용 건전지(충전지)를 쓰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고 기존의 일반 건전지가 쓰고 버리는 게 일이었는데, 충전지와 충전기의 등장으로 이 부분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동네 문방구에 트랙 하나쯤은 있었지..]


세상에 건전지에 수명이 다 되도 다시 살려낼 수 있다니 그 때는 그게 정말 신기했었는데, 여기서 ‘미니카’ 얘기를 하면 또 와셔튜닝부터 블랙모터까지 시작해서 온갖 잡다한 얘기까지 꺼내야 할 듯 하여(이것만 써도 특집기사) 아쉽지만 ‘미니카’ 얘기는 나중에 따로 기사를 써야겠다.

[건전지 먹는 귀신 – ‘게임보이’]이미지 출처=https://www.blendernation.com


비록 건전지 값이 의외로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지만(건전지 회사들은 좋아했을지도?) 손안에 들고 다니는 휴대용 전자 게임기라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큰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도 그 판매량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렇다고 건전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전원 어댑터 전원으로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유선으로 전기를 공급해서는 진정한 휴대용의 가치를 발휘할 수 없고, 휴대용이 되려면 건전지를 통한 전기 공급을 해야 했는데, 그 당시 필자의 친구가 ‘게임보이’를 큰 맘 먹고 빌려줬는데도 필자는 건전지 값 때문에 맘대로 들고 다니면서 하지도 못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난다. (이거 은근히 전기 많이 먹음)

그래도 닌텐도의 라이벌 세가(SEGA)가 내놓은 ‘게임기어’가 아무리 컬러 액정에 백라이트 기능까지 지원했다고는 해도 AA 건전지 6개를 넣고도 2~3시간도 못 버티는 것에 비하면 닌텐도의 ‘게임보이’는 불로장생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건전지를 6개나 살 돈이면 그 당시 학생 신분으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그 돈으로 3시간도 게임을 못 할거면 차라리 오락실을 가지!

‘게임보이’에 대한 글은 이미 [게임별곡 73] 신통방통 전설의 게임기 ‘게임보이’편에서 다루었으니 아직 못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 번 보시라. (그런데 필자도 기억나서 오랜만에 다시 보니 엉망이네?)
(링크 http://gametoc.hankyung.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98 )

 
■ 닌텐도의 기술 개발 철학을 만들어 내다.
 
최초의 휴대용 전자 게임기 ‘게임&워치’는 사실 개발자의 단순한 의도와 복잡한 산업요구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 당시 출장 업무로 신칸센 열차를 이용하던 요코이 군페이가 지하철 안에서 전자계산기를 손에 들고 이것저것 눌러보면서 신기해하는 사람을 보고 단순히 숫자만 누르는 것보다는 심심풀이로 무언가 더 재미있는 기능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래서 최초의 휴대용 전자 게임기는 회사원 같은 어른들의 장난감으로 그 크기도 와이셔츠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로 만들었다. 요코이 군페이 개인으로서는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요소를 추가하고픈 아이디어 정도였을지 모르지만, 이 얘기를 전해들은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며칠 뒤, ‘샤프전자’를 찾아가 ‘샤프전자’의 사장과 만나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때마침 강력한 라이벌 ‘카시오’에 밀려 전자계산기 시장에서 수익이 영 신통치 않았던 ‘샤프전자’는 기존의 전자계산기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놀이거리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어차피 전자계산기로 승부 내기는 힘들고 기술이야 기존에 쓰이던 기술들이 전부였고 아이디어만 조금 더하면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겠다 싶었던지 닌텐도의 게임개발 기술과 ‘샤프전자’의 전자계산기 액정 화면 기술이 합쳐져 새로운 기기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최초의 휴대용 전자 게임기 ‘게임&워치’의 탄생 배경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기존에 쓰이던 흔한 기술’ 이라는 점이다. 요코이 군페이가 인정받고 있는 가장 큰 부분은 독창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의 근본이 되는 개념을 정립했고 그것이 닌텐도의 철학으로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게임 시스템의 기발한 아이디어와는 달리 게임기 기계 자체는 굉장히 심플한 구조로 이루어져있는데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역시 간단한 전자계산기 수준의 구성이었다. 이것을 ‘말라버린 기술의 수평적 사고’, 또는 ‘쇠퇴한 기술의 수평적 사고’, 그것도 아니면 ‘낡은 기술의 수평적 사고’라 불리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평적 사고’라는 말이다. ‘수평적 사고’는 그 뒤로 닌텐도의 기술 개발이나 게임 개발의 철학적 근간이 되었다.

‘수평적 사고’라는 말이 어렵지만 쉽게 풀어 쓰면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구하기도 쉽고 전혀 새롭다거나 아주 뛰어나게 독창적이지도 않아서 제조 원가도 싸게 먹히고 그러니까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쉬운 기술을 뜻한다.

최근 하드웨어의 눈부신 발달로 자고 일어나면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모델이 벌써 구형이 되고 새로운 넘버링의 신제품이 등장하는 시기다. 당연히 제조원가에 마진을 붙이고 거기에 더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기업들만의 부가가치 창출을 더하면 최종 소비자 가격이 되는데 그 가격은 새로 출시한 신제품일수록 떨어지는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이전 제품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비싸게 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임 역시 하드웨어 플랫폼의 신기술을 따라가게 되고 보다 더 멋지고 더 화려하고 사실적인 그래픽에 치중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기술적 발달로 인한 시각적 특혜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게임 자체를 즐기는 실제 사용자들이 과연 어느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는지, 진정 재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부분은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잃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화려한 그래픽에만 치중한 대규모 MMORPG게임들이 정말 안 된 일이지만 출시 즉시 죽죽 망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하여 주위에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흔한 소재(하드웨어적 재료, 기술적 재료)를 활용해서 여기에 아이디어를 통해 ‘재미’ 자체에 집중해보면 뭔가 그럴듯한 물건이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처럼 기술적 가치가 아닌 재미의 가치에 더 많은 부분을 집중하고 투자하는 것이 ‘말라버린(쇠퇴한, 낡은) 기술의 수평적 사고’의 근간이다. 이런 철학적인 사고는 닌텐도뿐만 아니라, 1990년대 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다마고치’류 게임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제조 단가는 지극히 낮았다).
 

■ 전자공학도 요코이 군페이, 닌텐도는 그저 동네 회사라서 입사
전편에 얘기한 미야모토 시게루가 사장 친구의 아들인 이유로 회사에 입사했다면, 요코이 군페이는 단지 회사가 동네 근처라는 단순한 이유였다. 닌텐도는 한국이 아직 조선시대였을 당시 일본 ‘교토’에 살고 있던 공예가 출신의 ‘야마우치 후사지로’가 창업한 회사다. 교토는 일본에서도 유서가 깊은 지역 중에 하나다. 지금의 도쿄가 수도가 되기 이전 ‘헤이안(平安)’ 시대의 중심지였다. 전통적으로 일본 통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아직도 교토에는 1534개의 사찰과 245개의 신사(神社)를 비롯해 많은 유적이 있다. 도자기 산지로 유명하며, 닌텐도의 창업자 야마우치 히로시도 공예가 출신이었다.

[이미지 참고 : Top Tours & Activities in Kyoto]


현재도 닌텐도의 본점 소재지는 교토에 있다(100년 넘게 이사도 안 간 거냐?). 요코이 군페이는 일본 교토 부 교토 시 출생이다. 대학도 ‘도시샤 대학’을 나왔는데, 이 대학교도 교토에 있다(진짜 이 사람도 어지간히 움직이기 싫어하는 양반이었나 보다). 동네에 있는 대학교라고는 해도 ‘도시샤 대학’은 일본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명문 3대 사학(私學) 중에 하나로, ‘와세다 대학’,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함께 ‘도시샤 대학’을 꼽는다(윤동주 시인도 이 대학을 다녔다).

학연까지는 아니더라도 닌텐도의 3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가 와세다 대학 출신임을 볼 때 비슷한 레벨의 ‘도시샤’ 대학 출신인 요코이 군페이도 서류 심사에서 학력 부분에 가산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어디까지나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야마우치 히로시 역시 교토 출신이므로 학연에 더해 지연까지 있는 사이라고 억지로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코이 군페이는 대학의 전기공학과 출신으로 그가 닌텐도에서 이룬 업적을 볼 때 다분히 ‘전기공학과’다운 일들을 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전기공학과 출신이기는 해도 초기에 요코이 군페이가 맡았던 일은 당시 화투 제조업을 하던 닌텐도의 공장 설비 보수를 하는 기술자 정도였다. 사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공장에 남는 부품들을 이용해 장난감을 만들기도 했다. 그 때 공장 일이 지루해서 심심풀이로 만들었던 장난감이 한때 최고의 장난감으로 손 꼽히던 ‘울트라 핸드’의 탄생 배경이다.

[심심풀이로 만들어 대박난 '울트라 핸드'. 이미지 출처=https://www.tofugu.com]


이런 장난감을 만들어서 팔았더니 이게 대박이 났다. 원래 오리지널 장난감의 목적은 팔 끝에 뾱뾱이 같은 고무가 있어서 멀리 있는 물건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나, 한국에서 불법복제(?)했던 많은 유사품들은 물건을 집는 건 재미가 별로였는지 펀치 모양의 주먹이 달린 것들도 많아서 이걸 손에 쥐게 되면 꼭 누군가의 면상을 향해 펀치를 날리지 않고는 못 버티게 만드는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그때 한창 ‘컴퓨터 형사 가제트’라는 만화가 유행하던 시기라서 너도 나도 이 장난감을 손에 넣으면 ‘늘어나라 가제트 팔!’ 하면서 여기저기서 면상 후려 갈기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가제트 형사. 안돼! 거기에 비밀지령 쪽지를 버리면 서장이 폭발한다고!]


다소(사실은 상당히) 유치한 애들 장난 같겠지만, 그때는 다들 애들이었던 것을 어찌하랴. 아무튼 일본과 한국에서 이 늘어나는 팔 장난감은 인기가 많았던 것은 확실하다(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현지에 계신 분들의 증언을 기다린다). 요코이 군페이는 이 장난감을 시작으로 ‘울트라 스코프’나 ‘광선총’ 같은 장난감을 계속해서 만들어냈고, 그것들은 계속해서 성공했다. 화투로 돈을 벌던 회사에서 장난감으로 돈을 버는 회사로 닌텐도의 2차 변혁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장난감으로 제법 짭짤한 재미를 보던 닌텐도는 1975년 미국에서 출시된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보고 감명을 받고 가정용 콘솔 게임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닌텐도 제3의 변혁의 시작점이다.

[게임으로도 출시했다. 이미지 출처= http://v-f-h.blogspot.kr]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 남의 사업이었고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닌텐도만의 것을 갖기를 원했다. 이럴 때쯤에 같은 동네 출신이었던 요코이 군페이가 사장에게 제안한 내용이 전가계산기 크기 정도의 게임기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였고, 이것이 1980년에 ‘게임&워치’를 이름을 통해 세상에 선보여지게 된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야마우치 히로시는 이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바로 며칠이 안 되어 ‘샤프 전자’ 사장을 만나 협력에 대한 제안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닌텐도는 전자계산기 크기의 게임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가장 필요한 핵심 부품인 ‘액정’을 제조할 능력은 없었다. 당시 전자계산기 분야에 독보적인 존재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회사는 ‘카시오’라는 업체였다. 어차피 ‘카시오’에 밀려 애가 타던 ‘샤프 전자’는 닌텐도의 이런 제안에 선뜻 응했고 이렇게 어른들의 사정에 의한 비즈니스는 사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협력하게 된다.

‘샤프 전자’는 얼마나 이 사업에 사활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얼마만큼의 기대를 했던 결과는 그 이상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이런 사업적인 성공에 매우 흡족해 했던 ‘샤프전자’는 그 이후로도 닌텐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패밀리 컴퓨터’, ‘게임 보이’, ‘슈퍼 패미컴’ 등을 개발 할 때도 양사간의 기술 제휴를 맺었으며, ‘닌텐도 DS’의 개발에도 참여했다.

참고로 ‘샤프전자’ 역시 1912년에 설립한 닌텐도와 마찬가지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업체다(일본엔 이런 회사가 참 많아서 부럽다). 우리가 흔히 ‘샤프’라 불리는 필기도구의 명칭이 바로 이 ‘샤프’라는 회사에서 만든 필기도구다. 샤프 역시 초기 필기도구를 만들던 회사에서 전자계산기 사업으로 변경하고 후에 LCD 제조업체로 변경하면서 닌텐도와 같이 몇 번의 업종 전환을 통해 회사를 키워왔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닌텐도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2016년 ‘샤프전자’는 컴퓨터 부팅 화면에서 많이 보는 ‘Foxconn’에 인수되었다).

[ 이미지출처=http://www.ebay.es/itm/NINTENDO-GAME ]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워치’는 크게 성공하여 발매 당시 일본에서만 1300만대가 넘는 판매기록을 세우게 된다. ‘게임&워치’ 초기에는 원형 버튼만이 조작 기능을 제공했지만, 그 이후 1982년에 등장한 ‘동키콩’ 게임에서 십자버튼으로 조작 기능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십자버튼은 전 세계 휴대용 게임기의 표준이 되었다.

또한 이 때 만들어진 ‘게임&워치 동키콩’ 게임기는 훗날 ‘닌텐도 DS’ 개발에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물론 ‘NDS’ 말고도 ‘닌텐도’에서는 반으로 접었다 펴는 게임기들을 많이 출시했었다).

전편에 등장한 미야모토 시게루 역시 초기에는 요코이 군페이 밑에서 게임 개발을 시작해 지금의 ‘마리오의 아버지’ 칭호를 얻기 전까지 많은 업적을 그와 함께 했다. 요코이 군페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저력을 발휘해 ‘게임보이’를 만들게 되는데 이때 ‘샤프전자’는 당시 기준으로 무려 40억 엔(약 402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하고 요코이 군페이의 ‘게임보이’ 프로젝트를 위한 전용 공장까지 설립하면서 다시 한 번 짭짭할 수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기대는 여지없이 들어맞았고, 발매 이후 몇 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4000만대에 달하는 게임기를 판매하면서 ‘닌텐도’는 손 안에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로도 ‘NDS’를 거쳐 최근의 ‘스위치’까지 손 안에 휴대용 게임기는 아직도 닌텐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필자 역시 ‘게임보이 미크로(마리오 한정판)’과 ‘NDS’를 소유하고 있지만 ‘SONY’의 ‘PSP’는 버전 별로 3대나 갖고 있다(그 놈의 게임 ‘몬스터헌터’ 때문에..) 1980년대는 그렇게 요코이 군페이에 의해 닌텐도가 움직이고 시장을 장악해 가며 성장해가고 있었다. 1990년이 시작되고 게임 개발에까지 참여하여 필자도 명작으로 꼽는 ‘파이어 엠블렘’ 프로듀싱을 하는 등 요코이 군페이의 요코이 군페이에 의한 요코이 군페이를 위한 닌텐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던 요코이 군페이도 패전의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3D 게임기인 ‘버추얼 보이’의 실패였다. 지금에서야 정부지원 과제 등으로 ‘AR-VR’ 사업이 각광 받고 이슈화되는 시점에 이미 20년 전에 비슷한 개념의 게임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지만,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탓인지 대중들의 외면과 함께 수익 면에서도 큰 피해를 보고 출시된 지 1년도 안된 1996년 ‘버추얼 보이’의 단종과 함께 프로젝트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오랜 기간 정들었던 닌텐도를 떠나게 된다.

[버추얼 보이]

양쪽 화면에 시차 개념을 도입해서 3D 화면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휴대용 게임기와는 다른 불편함이 있었고(이거 쓰고 길거리 돌아다니기도 그렇고 들고 다니기에도 좀 거추장스럽고..) 집 안에서 혼자 이걸 뒤집어쓰고 할 게임이라는 것도 사실 딱히 없었다. (그러니까 ‘일루전’ 같은 회사랑 손을 잡았어야지!!)

[참고로 ‘일루전’은 최근 ‘VR 그녀’라는 게임을 출시했다.]


그렇게 회사를 떠난 요코이 군페이는 처음 시작했던 일(장난감 사업)과 그 뒤에 했던 일(게임)을 함께 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었고(주식회사 코트) 반다이남코의 ‘언더스완’ 게임기 개발에도 참여하는 등 역전의 노장같이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 그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1997년 10월 4일 필자와 친구들이 한창 게임 ‘디아블로’에 빠져 살고 있던 그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그의 나이 향년 56세). 거의 일평생을 닌텐도를 위해 살았고 닌텐도와 함께 살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볼 수 없지만, 그가 남겨 놓은 정신적 유산(수평적 사고의 개념)은 아직도 닌텐도의 개발정신의 철학으로 남아 있고 닌텐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그의 게임개발에 대한 철학을 따르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필자 역시 그 중에 하나이고, 그의 행적은 게임업계에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주고 영향을 남겼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또 무언가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었을 텐데, 정말 일찍 보내기엔 너무나 아쉬운 사람이다. 1996년 닌텐도를 퇴사하고 1997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니 닌텐도를 떠난 지 1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입사부터 퇴사까지 전 평생을 그리고 일생을 닌텐도와 함께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닌텐도를 세계적인 게임업체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스스로 그 시장의 선두에 서서 직접 진두지휘하며 결국에는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위대한 게임업계의 개발자로 인정받았다(부디 다른 세상에서는 평온하시길..)

“우수한 기술이 우수한 게임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첨단 기술은 오히려 개발과 생산에 비용을 발생시켜 아이디어를 경직시킬 뿐만 아니라 고가의 게임이 되어버린다. 기존의 기술을 다른 방향으로 활용하면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다.” — 요코이 군페이

글쓴이=김대홍 schnaufer@naver.com

필자의 잡소리
오랜 역사만큼 닌텐도라는 회사를 얘기하다 보면 끝이 없는 얘깃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얘기를 단 2회에 걸친 짧은 기사로 마무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닌텐도라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정도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얘기들을 잘 정리해서 책으로 내고 싶다. 그리고 게임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던 위대한 선배들의 발자취도 세세하게 기록해 두고 싶은 마음에 게임별곡 시즌2를 시작하게 되었다.

언제나 글을 쓰고 나면 부족하고 모자라서 독자 여러분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여러분보다 뭐가 더 대단하거나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단지 게임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이렇게 글을 쓰기 때문에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봐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작은 소망(이라 쓰고 허황된 야망이라 읽는다.)이 하나 있다면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 뒤에 그 누군가도 필자와 같은 마음으로 필자에 대한 이야기를 써주기를 바란다. 그 이전에 필자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먼저겠지만..

다음 편은 ‘닌텐도’를 얘기할 때 또 상대방으로 얘기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할 ‘세가(SEGA)’편이다. 그들은 로고부터 같은 텍스트 타입의 로고를 사용하며 ‘닌텐도’는 빨간색, ‘세가(SEGA)’는 파란색으로 암암리에(때로는 대놓고)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며 라이벌로 경쟁한다는 것을 널리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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