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는 게임을 물려줄 것인가

한 동안 게임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퇴근 후 게임을 해야 할 시간에 뉴스를 봐야했기 때문이다.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고, 뉴스 때문에 게임을 멈추는 날이 오다니. 처음에는 기가 막히고 황당하다가, 화가 치솟다가, 차츰 내성이 생길 지경이다. 이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모두 믿을 준비가 돼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청와대에서 ‘와우’의 오크나 ‘디아블로’의 네크로맨서가 나타난다 해도 의심하지 않겠다.

게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세계다.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모두에게 적용되는 룰이 있고 그 세계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오버워치’나 ‘리그오브레전드’에서 탱커와 서포터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던지는 이유는 하나다. 당장은 고통스러워도 그렇게 팀원을 위해 노력하고 희생한다면 언젠가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믿음은 자신의 노력이 가까운 미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유효하다. 소환사의 협곡에서 서포터가 딜러에게 미니언과 킬을 양보하는 것, 66번 국도에서 적의 공격을 맞아가면서도 화물을 미는 행위들이 그러하다. 게임에서 누군가의 노력은 반드시 적립되고 미래의 보상으로 이어진다. 그렇지 않은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2016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은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게임에서조차 지켜지는 보편적인 신념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 세계는 합리적인 룰이 작동되지 않음이 증명됐다. 국정농단 사태가 뉴스 전면에 등장한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주말마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인다. 수많은 이들이 상처와 분노를 촛불로 치유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감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픈 광경이다.

피의자로 공소장에 이름을 올린 대통령은 담화문으로 자신의 죄 없음을 수차례 강변하더니, 마침내 애매한 말로 책임을 국회로 떠넘겼다. 이는 게이머들이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디스커넥트(Disconnect)를 걸고 버티는 행위와 유사해 보인다. 절대 본인 스스로 GG를 선언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게임이 멈춘 틈을 타 국회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끌고 가려 한다. 동네 PC방이 아닌 청와대와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풀어야할 의혹만 해도 이미 산더미처럼 커졌으나, 반성하고 책임지는 이들은 보기 힘들다.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부인을 하고, 누군가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정치의 실패는 결국 광장에 나온 시민들에게 전가됐다. 그들은 또 다시 소중한 주말을 반납하고 이 겨울 광장으로 나설 것이다.

대통령만 퇴진한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분노의 끝이 어디인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시민들이 모이는 이유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룰을 지키지 않아도 승리하는 세상, 100만 명 이상의 함성으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면, 나중에 탓할 곳이라고는 결국 자신 밖에 없음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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