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경력 와우저가 본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후기

기자로 산 시간보다 와우저(WoW 유저)로 산 시간이 훨씬 많았다. 객관적 시각 따위는 뒤틀린 황천으로 보내버린지 오래다. 해외 평점이 낮다는 점이 걸리긴 했으나, 원작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덕에 영화가 삽질 좀 한다고 쳐도 용서할 준비가 돼 있었다. 원작에 대한 존중만 보여준다면, 나머지는 영화 ‘스트리트파이터’와 비슷한 퀄리티라고 해도 박수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예상 외로 무척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다. 엘윈숲 강가의 멀록이 ‘아옳옳옳’을 외치는 장면에서는 넝마를 걸치고 목검을 휘둘렀던 천둥벌거숭이 꼬꼬마 시절이 떠올라 한참을 상념에 젖었다. 스톰윈드의 전경이 비춰지는 부분에서는 처음 대도시에 발을 내딛고 그 웅장함에 전율에 떨었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카라잔의 첨탑이 위용을 드러냈을 때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처음 참가한 카라잔 레이드에서 좌절을 안겨준 몬스터 ‘모로스’가 생각났다.

메디브가 스톰윈드 포탈을 연 장면에서는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날 붙잡고 “법사님 포탈좀요” “법사님 물빵좀요” 하던 귓말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와우저라면 공감할만한 추억이 영화 장면 장면마다 녹아 있다. 아마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길드 모임에서 단체로 관람한다면 훌륭한 술안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일반 관객들이다. 황석희 번역가가 “원작을 몰라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문제 없다”고 말했는데, 머리로는 이해할지 몰라도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나 많다. 와우저에게는 대마법사 카드가의 찌질이 시절과 스톰윈드의 영웅 바리안 린의 주니어 시절 모습을 실사로 목격한다는 것 자체가 전율이다. 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그 장면이 왜 감동적인지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다.

영화는 각 인물들의 스토리에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장면을 할애한다. 대사는 없지만 그롬 헬스크림마저 쓸데없이 얼굴을 비추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각각의 인물들이 크게 활약하는 후속작을 생각한다면 분명 필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 하나만 놓고 보면 군더더기 플롯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각각의 인물들의 입장을 시시콜콜 설명하기 위해 5초 단위로 바뀌는 교차편집이 호흡을 턱턱 끊는다.

인물에 집중하다보니 스토리의 당위성은 얼렁뚱땅 넘어간다. 왜 정의남 듀로탄이 절대악 굴단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는지, 왜 ‘그 사람’은 인간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했다. 배신이 난무하는 영화이지만, 왜 배신했는지는 와우저가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른다. 여기에 원작과는 180도 다른 밑도끝도 없는 러브라인이 화룡점정이 됐다. 이 무책임한 스토리텔링을 일반 관객들이 관대하게 봐줄지가 걱정스럽다.

사실 제일 걱정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전쟁의 서막’이다. 정말 흥미진진한 부분은 다음에 나온다. 스랄, 제이나 프라우드무어, 아서스 메네실, 일리단 스톰레이지 등 와우저들을 열광하게 했던 영웅들도 다음 편이 되어서야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해리포터’ 시리즈로 말하면 주인공 해리포터는 나오지도 않는, 해리포터 부모님의 이야기를 그린 프리퀄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본편에 비해 밋밋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와우저들은 참고 기다리면 풍성한 메인디쉬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번 영화는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의 풍미를 더욱 배가시켜주는 훌륭한 에피타이저다. 그러나 메인디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일반 관객들에게는 그냥 신선한 푸성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요약하면, 이 영화는 와우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선물이다. 꼭 봐라. 두번 봐라.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 관객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영화다. 이번 편은 모르겠지만, 다음 편부터는 확실한 꿀잼을 보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음 편이 나온다는 가정 하에 하는 이야기다. 와우저들을 위한 첫 번째 선물은 9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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