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은 게임이 아니라 영상이 먼저다? 그 말에 결사반대하는 이유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대중화를 이끌 견인차는 게임이 아닌 영상이 될 것이다.”

취재하면서 만났던 VR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다. VR 저변이 확대되려면 최우선으로 VR콘텐츠가 충분히 공급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게임보다는 비교적 제작하기 쉬운 VR영상이 초반 콘텐츠 품귀 현상을 해소해줄 것이라는 이야기다. 카메라 여러 대를 이어붙여 전방향을 촬영한 후 해당 영상들을 솔루션의 도움을 받아 스티칭(stitching, 바느질)하면 뚝딱 완성된다. 실제로 현재 유튜브 등에서 공개된 VR 콘텐츠 중 거의 대부분이 영상이다.

새 플랫폼에 가장 발빠르게 대처하는 쪽은 미디어들이다. 공중파 방송에서부터 인터넷개인방송업체까지 VR영상을 개발하고 실제방송에 적용하기 시작했다며 난리법석이다. 한 메이저언론사는 대통령이 자기들이 만든 VR영상을 관람했다는 자랑을 늘어놓는다. 어찌나 실감나던지 “화면 속에 들어간 것 같다”는 표현까지 했단다.

괜한 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문득 걱정이 앞선다. 미디어들이 VR영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대부분은 진정한 VR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360도 영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모노스코픽(monoscopic, 평면) 360도 영상이다. 구글 스트리트뷰나 네이버지도 거리뷰에서도 볼 수 있었던, VR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한참 전부터 있었던 기술이다. 웹에서 보던 것을 HMD로 본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기술이 어느새 ‘360도 VR영상’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있다. 그리고 VR을 처음 접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VR에 대해 오해하고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VR과 360도 영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난해부터 씨넷 와이어드 등 외신들을 중심으로 둘의 차이를 구분짓고 정의내리고자 하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는데, 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상호작용과 자유도 유무를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비교적 비슷했다. 즉,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스토리를 진행시키며 사물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이 VR이고, 단순 관람만 할 수 있는 것은 360도 영상이다. 사용자 경험은 물론이고, 확장성이나 사업성에서도 둘은 확연한 차이가 난다.

게다가 360도 영상이라고 다 같은 360도 영상이 아니다. 모노스코픽 360도 영상과 스테레오스코픽(stereoscopic, 입체) 영상으로 또 나뉜다. 둘의 차이는 북미 삼성전자 개발자 사이트(http://www.samsung.com/us/samsungdeveloperconnection/developer-resources/gear-vr/monoscopic-vs-stereoscopic-360-videos.html)가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을 정리하자면 모노스코픽 360도 영상은 일반 영화를 360도 파노라마로 만든 것이고, 스테레오스코픽 360도 영상은 3D 입체 영화를 360도 파노라마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모노스코픽 360도 영상에는 입체감이 전무하다. 사물이나 사람이 눈 앞에 등장해도 바로 앞에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둥근 지구본 모양의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 한가운데에서, 벽면에 주사되는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스테레오스코픽 360도 영상은 사실감과 몰입감 측면에서 VR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쳐도, 모노스코픽 360도 영상은 VR의 기본적인 정의와 한참 거리가 멀다. 상호작용도 없고, 입체감도 없다. 구글 스트리트뷰의 동영상 버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콘텐츠는 그만큼 질이 낮은 법이다.

문제는 현재 나돌고 있는 360도 VR영상 중 열에 아홉은 이 모노스코픽 360도 영상이라는 점이다. 삼성 ‘기어360’ 등의 카메라만 있어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TV가 자랑하는 VR생방송도, OGN이 세계최초로 시도한다는 e스포츠 VR 생중계도 모두 모노스코픽 360도 영상이다. 그래서 VR영상을 처음 접하는 주변 지인들로부터 “기대했던 것보다 실감도 안나고 별로더라”는 반응을 족족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장님 코끼리 더듬는 것 같아 답답하다. 

그래서 “VR은 영상이 먼저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공급이 아닌 수요 측면에서의 VR은 게임이 먼저다. 반드시 먼저여야 한다. VR 입문자들은 에픽게임스의 FPS게임 ‘불릿트레인’이나 반다이남코의 ‘서머레슨’과 같은 웰메이드 VR게임을 제일 먼저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VR이 무엇인지, VR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수 있다. 그 후에 영상으로 돌아가도 충분하다.

김성완 부산게임아카데미 교수는 “360도 영상은 VR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라고 말했다. VR의 범주에 넣을 수는 있지만 가장 아래 경계선에 턱걸이했다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VR은 3D 입체 TV와는 달리, 더 기대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며 “향후 5년에서 10년 정도 발전을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앞으로 2년간 VR 프로젝트에 5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무리 영상이 VR 대중화를 이끈다고 해도, 모든 비용이 모노스코픽 360도 영상 산업으로 몰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게임도 좋고, 애니메이션도 좋고, 시승 시뮬레이터도 좋다. 다양한 분야의 VR을 골고루 지원함으로써 제대로 된 생태계를 추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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