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캐릭터 전략 시뮬레이션...인기 소설 속 전투 게임으로 재현 열광

필자가 중학교쯤에는 세상이 격변하는 것과 같이 게임, 만화, 소설, 음악 등에 다양한 쇼크들이 일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쯤에 음악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데뷔를 했다. 오락실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II’가 있었고, 학교 교실에서는 너도나도 서로 줄을 서서 빌려 보던 만화책이 ‘시티헌터’라든가 ‘드래곤볼’, ‘슬램덩크’였다.

물론, 선생님에게 걸리면 압수는 물론이고 몽둥이 찜질까지 1+1 행사로 덤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학교에는 늘 불량만화와 음악과 게임이 암암리에 유통되고 있었다. 일종의 우리들만의 블랙마켓이었다. 그 중에서 어느 날 소설 하나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너도나도 줄을 서서 빌려 볼 정도였는데, 그 소설의 이름이 ‘은하영웅전설’이다.

■ 학창시절 뒷자리에서 몰래 보던 소설

[전설의 시작..]
필자가 처음 이 소설을 보는 친구들을 봤을 때 필자는 소설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던 터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라인하르트’니‘얀 웬리’니 하면서 티격태격 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길래 애들이 이 지경이 됐을까? 하는 마음에 1권을 손에 잡고 그 뒤로 밤을 새가며 며칠을 책만 읽고 10권까지 쭉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성공한 남자의 플래그 쉽‘브륜힐트’]
필자는 그 중에서도 제국군에 완전 빠져들었고, 그 뒤로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동차를 사게 되면 꼭 은백색의 차를 산 다음에 애칭도 ‘브륜힐트’라고 짓겠다고 다짐했다(결과만 얘기하자면 현재 필자의 자동차는 검은색이다. ‘흑색창기병’이라 해야 될는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필자와 친구들이 보던 ‘은하영웅전설’ 소설책은 표지가 까만색의‘OO서적’에서 출판한 책이었는데 이것이 해적판이라고 한다. 2000년도에 새롭게 정식 출판한 ‘서울문화사’의 정식 판본이 있는데 둘 다 읽어 본 입장에서는 해적판이 왠지 조금 박진감이 넘치는 느낌이다.

현재는 해적판의 경우 전권(1~10권)을 온전히 구매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며, 중고장터에서나 간신히 구할 수 있는 유물이 되어버렸다. 다만, 해적판의 경우 일부 삭제되거나 번역이 잘못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이 부분 때문에 정식 출판 버전과 함께 오래도록 논란거리가 되었다. 소설 외에도 애니 본편 OVA 110편과 외전, 극장판 등 제대로 한 번 클리어 하려면 한 달 정도는 시간을 비워둬야 할 것이다.

■ 상상 속의 전투가 현실의 게임으로 등장
필자와 필자의 친구들 중에 ‘삼국지’를 안 읽어 본 친구는 있어도 ‘은하영웅전설’을 모르는 친구는 없는데(‘삼국지’ 안 읽은 친구도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정도는 알더라) 그만큼 그 시절에는 대 유행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에도 꽤 많은 광고가 실리기도 했는데, 늘 말로만 ‘내가 제국군 총사령관 누구이고 너는 반란군이고’하면 동맹군 편인 친구가 발끈해서 ‘내가 왜 반란군이냐 이 망할 제국군아’ 하면서 의미도 없는 말싸움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말싸움도 지칠 무렵 그러던 중에 필자와 친구들은 어느날 게임 잡지를 보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 같은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은하영웅전설 III SP’]
바로 ‘은하영웅전설 III SP’라는 게임을 발견한 것이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게임이 있는 줄 몰랐는데, 말싸움으로만 하던 것을 게임으로 직접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필자와 친구들은 바로 게임을 구했다. 그 뒤로도 시간만 나면 필자와 친구들은 너도나도 제국군이나 동맹군에 속해서 상상 속에 빠져 살았다(그런데 ‘페잔 자치령’편은 없었다..). 이 게임은 1994년 ‘SKC’를 통해 정식 발매되었다.

게임 자체는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에 속해 있었지만, 현재도 몇 안되는 희귀한 장르인 ‘SF 전략 시뮬레이션’장르였다. 게다가 사전에 소설 10권과 외전 4권을 이미 달달 외울 정도로 독파한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이름을 거의 전부 알고 있었다(솔직히 ‘삼국지’ 게임도 하다 보면 이런 사람이 있었나? 하고 잘 모르는 사람도 간혹 나오긴 하는데..). 나오는 기함만 봐도 누구의 기함인지, 어느 편에 속해 있고 인물의 성격이 어떠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게임에 한 번 빠져든 친구들은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제국을 위하여!]
하지만, 아무리 ‘은하영웅전설’에 빠져 살았고 팬심을 발휘한다고 해도 게임의 그래픽은 1990년대 초~중반의 그 당시 기준으로도 그렇게 썩 좋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품질이었다. 그래도 게임의 그래픽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늘 상상 속에서만 얘기 했던 것을 실제 게임으로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필자와 친구들은 충분히 만족했다.

이때쯤 VGA 256컬러 이상의 것을 추구하며 나날이 발전해 가는 게임 시장에서 갑자기 과거로 회귀한 듯한 이 게임의 그래픽은 적잖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실제로 게임을 하다 보면 이게 256컬러인지 16컬러인지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파벳들이 떠다닌다?]
게임의 전투 맵 역시 최대한 간략하게 필요한 정보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함대의 함선 표시들도 알파벳 기호로만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후에 최신 시리즈 등에서는 함선 등의 이미지로 표현). 처음 몇 번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전함은 ‘B(Battle Ship)’이라든가 순양함은 ‘C(Cruiser)’, 구축함은‘D(Destroyer)’등의 현실 세계에서도 칭하는 병기의 약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몇 번만 봐두면 금세 익숙해진다.

게임의 그래픽보다 더한 재미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중에 당시에는 주로 ‘턴(Turn)’ 방식의 게임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이 게임은 ‘턴(Turn)’ 방식과 ‘리얼타임(RTS)’ 사이에서도 오묘한 게임 진행 방식을 선보였다. 바로 ‘동시(실시간) 턴’ 방식인데, 기존의 ‘삼국지’와 같은 턴 방식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아군이 한 턴 진행하고 다음은 적군이 한 턴 진행하면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 두들겨 맞는 장면이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동시에 한 턴씩 진행하는 방식이다. 명령을 입력하고 완료를 하면 서로 동시에 이동 및 공격이 시작된다. 다음 턴의 적군의 움직임이나 공격-방어 등의 전술을 꿰고 있지 못하면 아군 함대의 옆구리가 신나게 박살나는 것을 구경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턴 한 턴 진행하면서 매우 신중하게 적군의 움직임에 대해 예의 주시하며 게임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래서 다른 여타의 게임보다 ‘정찰’의 중요성이 부각된 게임이기도 했다. 

■ ‘라인하르트’ ‘얀 웬리’ 등 캐릭터 전략 시뮬레이션
이 게임의 특이점 중에 하나라면 국가를 선택하는 친구보다는 캐릭터 어느 누구 하나를 선택해서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제국이나 동맹편이 아니라 제국군의 누구, 동맹군의 누구 하는 식으로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었다.

[얀 웬리.. 이 뒤로 필자도 홍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필자는 주로 제국군의 ‘라인하르트’를 좋아했지만, 필자의 친한 친구 중에 한 명은 ‘얀 웬리’를 좋아하며 스스로를 그와 동일시했다(뭐 말로는 뭐를 못 하나..). 비록 학생이라 술은 입에 델 수 없었지만, 홍차 정도는 마실 수 있었다. ‘은하영웅전설 3 SP’ 게임이 출시된 비슷한 시기에 ‘홍차의 꿈 –실론티’라는 음료가 출시되었는데, 필자와 친구들은 그 음료를 즐겨 마셨다. 그리고 늘 안타까운 ‘얀 웬리’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콜라만 마시던 필자에게 또 다른 음료 하나를 선택하라면 ‘홍차’를 선택하게 할 만큼 이 소설과 게임은 필자나 친구들에게 삶의 많은 부분을 바뀌게 만들었다. 또한, 소설이나 게임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의 개성도 넘쳐나지만, 그들을 보위(保衛)하는 캐릭터들 역시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고 특출난 개성으로 캐릭터들을 연구하는 재미도 있었다.

‘삼국지’ 역시 그런 부분이 일맥상통하는지라 종종 ‘은하영웅전설’은 ‘SF 삼국지’ 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그 당시 필자와 친구들에게 ‘삼국지’보다 ‘은하영웅전설’이 더 인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삼국지’는 이미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라고 한다면 ‘은하영웅전설’은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너도나도 소설 속의 누구라도 될 ‘가능성’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더 인기가 많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몰입할 수 있었고, 소설 속 캐릭터의 성격을 닮고자 애쓰기도 했었다. 지금 보면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고등학교의 즐거운 추억이다(자칭 ‘얀 웬리’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루지 못 한 꿈이여..]
필자와 같이 주인공을 자처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꼭 그런 친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인 ‘로이엔탈’이라든가 ‘미터마이어’를 자칭하는 친구도 많았다. 하긴, 이들도 주인공에 속하는 캐릭터들이라고 볼 수 있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정말 생긴 것도 분위기도 ‘오벨슈타인’과 똑 같은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는 스스로 자처하지 않아도 누구나 한 번 보면 ‘오벨슈타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밖에도 ‘파렌화이트’ 라던가 ‘비텐펠트’나 많은 캐릭터들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대부분 제국군 편이었다. 의외로 당하는 입장처럼 느껴지는 동맹군은 친구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유독 한 친구만이 ‘얀 웬리’를 자처하며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비록 제국군을 지지하며 제국군 캐릭터들을 좋아했지만, 자유에 대한 의지와 신념만큼은 동맹군의 ‘얀 웬리’를 지지했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문구는 ‘최선의 독재보다는 최악의 민주주의가 낫다.’ 라는 말이다.

이렇게 특이한 전투 진행 방식과 소설의 인기와 소설을 뛰어넘는 소설 속 캐릭터들의 인기에 힘입어 그 뒤로도 한국에서 계속 정식 발매 된 ‘은하영웅전설’ 시리즈는 ‘은하영웅전설 3SP’를 시작으로 ‘은하영웅전설 4EX’, ‘은하영웅전설 4EX 윈도우’, ‘은하영웅전설 5GB’, ‘은하영웅전설 6’ 시리즈 등이 발매되었다.

게임의 시리즈 1편과 2편은 ‘MSX’나 ‘PC-9801’ 등의 기종으로 발매되어 PC만 접한 유저는 게임을 접해 볼 기회가 없었다. 이전에 8비트 세계를 접해보지 않고 XT나, AT, 386 등으로 PC(IBM-PC 호환)만 써 본 친구들은 ‘은하영웅전설 3 SP’가 처음 시작하는 시리즈 게임이 되었다. 참고로 ‘은하영웅전설’ 1편은 필자가 즐겨 보던 컴퓨터 잡지 ‘마이컴’ 1990년 5월호에 별책 부록 ‘게임컴’에 실렸다. 그 때 같이 소개된 게임들이 ‘F15 STRIKE EAGLE II’, ‘무도관’, ‘데스트랙’, ‘은하영웅전설’, ‘룬위스 : 검은 옷의 귀공자(MSX2)’, ‘윈드워커(애플, 16비트)’ 게임들이 소개 됐었다.

■ 필자의 잡소리
종종 이 소설을 ‘장대한 우주 대서사시’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상상력의 한계인지 현명한 대중과의 타협인지 모르겠지만, 우주를 넘나들며 광속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서도 볼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부분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게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사는 ‘우주’라는 머나먼 미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현실 세계에서도 곱씹어 볼 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어서 가끔씩 생각 날 때 꺼내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얀 웬리’와 그의 아버지가 나누던 대화 중에서 자유행성동맹에서는 타도의 대상이며 악의 축이라 일컫는 제국의 ‘골덴바움’ 왕조에 대해 그렇게 나쁘다면 어째서 제국의 국민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했는가에 대한 대화만 봐도 그렇다.

그에 대한 ‘얀 웬리’의 아버지가 한 얘기는 ‘민중이 편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지. 자신들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디선가 초인이나 성인이 나타나 자신들의 고생을 혼자 떠맡아주기를 바랐지. 루돌프는 그것을 이용했던 거야. 알겠니, 기억해 둬라. 독재자란 출현시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 죄는 똑같다’라는 대사와 같이 단지 소설이나 게임이라고 해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그런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한 편의 기사로 ‘은하영웅전설’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쓰기엔 너무 벅찰 만큼 이 작품은 본편 외에도 전체 규모가 방대한 내용이다. 그래서 본 [게임별곡]은 그 중에서도 게임 한 편 ‘은하영웅전설 3 SP’에 대한 추억에 대해 글을 써보았다. 못다한 부분들은 아직 이 작품을 못 본 분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으로 남겨 두도록 하겠다.

한경닷컴 게임톡 큐씨보이 객원기자 gamecus.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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