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톡 연재 ‘인디 정신이 미래다’ 38. 조영거 ‘흉내바둑’

게임톡 연재 ‘인디 정신이 미래다’ 38. 조영거 ‘흉내바둑’

현대에는 다양한 비디오게임들이 만들어져 예전보다는 많이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두 명의 사람이 마주앉아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게임판 위에 흰 돌과 검은 돌을 서로 번갈아 내려놓아 상대의 돌을 사로잡고 자신의 집을 만들어 누가 더 많은 칸을 확보하는지를 겨루는 보드게임이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까마득하여 아마도 중국의 요순시대를 거론해야할 것이다. 그만큼 수많은 고수들이 있었고 다양한 전략들이 개발되어 왔다.

출처 = http://blogs.douglascountylibraries.org/dcl/files/2014/05/Go-Game.jpg
직장인을 바둑으로 비유한 웹툰 원작 드라마 ‘미생’ 신드롬이 거세다. 프로바둑의 문하생이었다가 낙하산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장그래의 고분고투에 눈시울을 적셨다는 이들이 많다는 현상을 보면서 인디게임을 떠올렸다. 인디게임도 또 다른 장그래가 선택한 처절한 생존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

바둑을 조금 배우다보면 ‘흉내바둑’이란 것을 알게 된다. 이론은 간단하다. 바둑판은 상하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둑판 한가운데의 천원을 중심으로 상대방이 착수하는 곳의 점대칭되는 칸에 착수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미치고 답답할 노릇이지만 이것도 바둑 규칙에서 인정하는 한 가지 전략일 뿐이다.

흉내바둑은 여러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우선 흉내바둑이 진행되는 동안은 상대방과 자신의 착수에 따른 유불리가 없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보다 고수라면 흉내바둑을 하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실착을 줄일 수 있다. 상대방이 집을 확보하면 나도 집을 확보한다. 상대방이 돌을 따내면 자신도 돌을 따낸다. 한 점씩 돌을 놓는다면 어차피 똑같이 이득을 취하기 때문에 대개 초중반이 약하고 끝내기가 강한 사람이라면 초중반을 흉내바둑으로 진행한다면 굉장히 승률이 올라갈 것이다.

또 하나의 이점이라면 흉내당하는 사람의 심리적인 부분을 흔들어 놓아 제대로 자신의 바둑을 둘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은 다른 스포츠보다 훨씬 더 정신적인 부분이 승패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이런 종류의 전략은 제대로 파해법을 모른다면 그대로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말려들 수 있다. 단 한 수의 실착이 곧 패배로 이어지는 고수 간의 대결에서도 종종 흉내바둑이 사용되어져 왔는데 고수라고 모두 여유롭게 웃으며 흉내바둑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흉내바둑은 늦게 착수하여 불리한 백에 6집반을 더해주는 덤 제도가 생기면서부터 '절대 패할 수 없는 전략'에서 '선택적으로 활용가능한 전략의 하나'로 바뀌었다. 우선 흑은 덤에 대한 부담때문에 첫 착수를 천원에 할 수 없게 되었으며 - 천원이 6집반 이상의 가치를 가져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어렵다 - 경기 내내 덤을 극복하기 위해 공격적인 수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흉내바둑이 되려 좋지 않은 전략이 된다. 반대로 백은 여전히 흉내바둑이 괜찮은 전략이자 이득을 볼 수 있는 전략이다.

이처럼 흉내바둑은 꽤나 괜찮은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데 혹자는 상대방의 전략을 따라한다는 것 자체가 갖는 찝찝함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나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둑에서 이와 같은 행위는 일종의 금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덤 제도 역시 흉내바둑의 효용성을 크게 떨어뜨렸는데 실제로 흉내바둑 때문에 덤 제도가 생겼다는 얘기도 있다. 이 말은 즉 만약 덤 제도도 없고 예의도 고려하지 않는다면 흉내바둑이야 말로 필승전략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흉내바둑은 비단 바둑에서만의 얘기로 볼 문제는 아니다. 현대사회는 수 많은 시장에서 흉내바둑을 두는 사람이 많다.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은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전략 중의 하나이다. 시장 선도자가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를 하면 뒤에서 따라가며 보고 있다가 괜찮은 것만 취하여 따라한다. 실패로 인한 손실도 크게 줄일 수 있고 비용예측도 용이하다. 대부분의 시장에서 1등보다 2등이 대박을 터뜨렸다는 얘기는 이제 흔한 얘기이다.

인디게임 개발자에게 있어서 다른 게임을 따라 만든다는 것은 바둑에서와 같이 꽤나 ‘찝찝’하고 ‘예의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어질 것이다. 게임은 예술이다, 자신 만의 게임을 만든다, 라고 하는 모토에서 패스트 팔로워 전략은 그냥 도둑놈이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흉내바둑을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되려 흉내바둑을 끊임없이 고민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게임을 흉내바둑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비디오 캡처. 출처 = 애니메이션 ‘히카루의 바둑’ http://hagohago.tistory.com/m/post/68
흉내바둑을 파해하는 방법 중 가장 알기 쉬운 방법은 결코 흉내를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착점, 천원에 착수하는 것이다. 천원은 점대칭되는 곳이 천원 자신이다. 천원을 흉내바둑할 수 있는 착점은 없다. 천원에 착수되는 순간 흉내바둑은 깨지고 평범한 바둑이 된다. 바둑판의 가로줄과 세로줄이 홀수인 것도 이런 천원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흉내바둑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관람 포인트는 천원에 언제 착수하느냐이다. 흑의 흉내바둑이 강력한 이유도 흑이 천원에 착수하기 때문이다.

인디게임은 저마다의 팬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자신 만의 팬을 만들고 고유의 시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면 이제 게임의 흉내바둑을 틀어막기 위해 흉내바둑의 파해법을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천원을 찾아야 한다.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천원을 찾아내 자신의 돌로 채워버려야 한다. 거대 자본이 되려 먼저 착수하기 전에 원천봉쇄하지 않는다면 높은 퀄리티의 카피캣이 오리지널 행세를 하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천원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문득 “다 자기만의 바둑이 있는 건데,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뭐라고 감히 비루한 훈수질이냐”는, 박대리의 행동을 보고 난 후 장그래가 한 생각을 떠올려본다.

한경닷컴 게임톡 조영거 객원기자 jo@novn.co

■ 조영거는?
2007년 넥슨에서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로 업계에 뛰어들었다. 2009년부터 스마트폰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1인개발 인디게임인 'RPG Snake'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후 넥슨 공동개발 프로젝트인 '버블파이터 어드벤처'를 출시하는 등 꾸준히 모바일 게임을 개발해오고 있다.

2013년부터 새롭게 설립한 모바일 게임 개발사 노븐(NOVN)으로 차세대 소셜 게임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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