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 게임계 한 획을 그을만한 명작...땀내 나는 링 재현 박수

필자의 막내 삼촌은 젊은 시절 꽤 놀았던 형님으로.. 한때는 권투선수를 하기도 했다. 경기에서도 종종 좋은 성적을 냈던 것 같은데, 어느날 군대를 간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연락이 되지만.. 그런 막내 삼촌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필자는 권투라는 스포츠에 대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직접 적인 영향을 받았다. 프로 권투 선수의 잽을 받아내는 상대로 어린 꼬마라니.. 그래서 지금도 17대 1까지는 아니더라도 1대 1 정도는 문제없다(물론 3살까지..).

▲ 1991년 출시작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권투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필자는 누구보다도 영화 ‘록키’를 처음 봤을 때 남 일 같지가 않았고 ‘아이 오브더 타이거(Eye of the Tiger)’라는 노래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야 했다. 그렇게 권투를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권투 게임들도 관심 있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권투 게임을 해봤지만, 오락실에 권투 게임들은 재미있는 게임들이 있었지만, 문제는 정작 집에 오면 할 만한 권투 게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권투 게임들이 몇 개 있긴 했지만, 뭔가 필자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게임들뿐이었고 그렇게 적적하게 지내던 어느날 3D 시대도 아직 멀었는데, 거기에 하나 더 해서 ‘4D’라는 이름을단 게임이 등장했다. (물론 이름만) 원래 이름은 ‘4D SPORTS BOXING’ 이라는 게임이지만, 보통은 ‘4D Boxing’ 이라 부른 게임인데, 확실히 이름처럼 게임이 4차원적이기는 하다.

■ 4D(4 Dimension) 권투?...한 방 한 방 꽂힐 때마다 짜릿

▲ 캐릭터를 만들어 보자
게임의 이름에 ‘4D’ 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데, IT 사전에 의하면 ‘4D’란 4 Dimension의 약어다. 가로축, 세로축, 높이 축을 가진 입체 공간을 3차원(3D) 공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시간축을 더한 것(컴퓨터인터넷IT용어대사전, 2011.1.20, 일진사)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뭔가 대단하긴 대단한 이름이다. 그 당시 ‘3D’라는 것도 신기술로 취급되던 시절이고 아직 제대로 된 ‘3D’는 PC환경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시대였다. 그런데 한 차원 더해서 ‘4D’라니.. 시대를 앞서간 게임(이름)이다. 물론 이름에 담겨있는 열정만큼 그래픽은 따라오지 못한 것 같지만, 아무리 고전 게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 당시에도 그렇게 그래픽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게임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름에 현혹되지 않고 게임 자체만 즐기고자 한다면 이 게임은 권투 게임계에 있어 한 획을 그을만한 명작이다. 기존에 권투 게임들이 아예 코믹하게 나가던가 아니면 너무 리얼하게 표현되는 것에 비해 이 게임은 이도저도 아니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그만의 특징과 느낌을 지니고 있는 게임이다.

게임을 시작하게 되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의외로 권투 게임답지않게 미세한 설정이 가능해서 보여지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볼 수 없는 부분에 디테일을 주었다. 키는 물론이고 체중이나 스피드, 파워, 체력 등 흡사 RPG 게임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스탯을 설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힘민지’로 통하는 힘, 민첩, 지능에 따른 분류는 안 되겠지만, 스피드나 파워 수치를 통해 힘 영웅이나 민첩 영웅 등으로 만들 수 있었다(왜 지능이 빠져있는지는 모르겠다). 복싱에서 흔히 얘기하는 ‘아웃 복서’인가‘인파이터’ 인가를 나누는 기준인 것 같다.

▲ 진짜 깍두기 같이 생긴 이런 형님들이 나온다.
그래픽은 계속 얘기하지만, 크게 봐줄만하지 않다. 저 당시에도 저보다 미려한 그래픽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게임 내에서 3차원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만족하자. 캐릭터들은 얼굴 모양도 바꿀 수 있는데, ‘RPG’ 게임에서 신규 캐릭터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아무리 돌려도 기대한 만큼의 얼굴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대충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면 만족하자. 게임을 처음 했을 때 한참 자라나는 청소년기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180cm이 넘지 않는 것이 늘 불만이었던 필자는 캐릭터 키(‘Height’)를 최고치로 올려서 장신(長身)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처음 만들어질 때만 매우 흡족해서 박수까지 쳐댔지만, 막상 링에 올려 보내자 그 환호는 금세 야유로 바뀌고 말았다. 캐릭터의 키가 크고 체중이 따라주지 않거나 하면 굉장히 아메바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캐릭터를 만들 때는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중을 가진 캐릭터가 제일 좋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은 법이다.

어찌됐든 원조 깍두기 모양의 캐릭터까지 만들었다면 이제부터는 실전으로 들어가는데, 시합을 하면서 승리할 때마다 순위(랭킹)도 올라간다. 시합에서 승리하면 보너스 능력치를 얻게 되는데 이것으로 자신의 선수 능력치를 조금씩 올릴 수 있다. 힘을 중시할 것인가? 스피드를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그 중간에서 타협을 할 것인가? 능력치를 올릴 때마다 고민이 거듭되는데, 다음 경기를 할 때마다 ‘아 속도를 좀 더 올릴 걸’, ‘아, 힘이 모자라나?’ 하고 경기 내내 후회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상위 랭커 선수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야 하는데, 필자는 한 번도 챔피언까지 가본 기억이 없다. 의외로 쉽지 않은 난이도인데, 펀치 역시 버튼 하나로 단순하게 입력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좌우 연타를 계산해가며 상단 하단 등의 위치에 따른 입력도 가능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경기를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이야~ 싸울 맛 좀 나겠는데..
상대방에게 펀치를 먹일 때의 타격감은 의외로 괜찮았는데, 상대 선수에게 펀치를 한 방 한 방 꽂힐 때마다 짜릿한 느낌이 있었다. 가드를 풀고 안면을 강타하거나 빈 복부를 노리고 펀치를 먹이는 등 게임 하는 내내 상대 선수의 움직임에 따라 차별화된 게임이 가능해서 몰입하는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격렬한 시합 종료 후에는 얼굴이 망가지는 것까지 표현되어 있었는데, 캐릭터 자체에 폴리곤을 많이 쓰지 못해서 그렇지 기획적인 내용으로는 참신한 시스템이었다. 뭐 원래 얼굴이나 망가진 얼굴이나 망가진 폴리곤인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픽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필요 없을 듯 하고, 그래픽 자체가 재미를 주는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이 게임을 하면 느낄 수 있다. 단지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지 않고 게임의 진행 과정에서 치고받는 땀내 나는 링을 재현해 냈다는 것에 훌륭한 평가를 줄 수 있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드물게 선수의 능력치를 점차 업그레이드해 가면서 키우는 시스템으로 어떻게 보면 이 게임은 단순한 스포츠 게임이 아니라 ‘육성 시뮬레이션’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 역사적 가치 높은 앞서간 게임
이 게임은 ‘EA’로고를 달고 출시되었지만, 실제 개발사는 ‘Distinctive Software(DSI)’라는 다소 생소한 회사의 게임이다. ‘DSI’라는 회사에서는 ‘4D’ 시리즈로 게임을 개발했는데, 당시에 ‘Stunts (4D Sports Driving)’, ‘4D Sports Tennis’, ‘4D Sports Boxing’ 이렇게 3종류의 게임 중 가장 성공한 게임이 ‘4D Sports Boxing’ 게임인 것 같다. 원래는 1991년에 1.0 버전으로 출시됐었는데, 다음해에 1992년 ‘EA’의 로고를 달고 버전 2.0으로 출시되었다.

▲ 동서게임채널에서 정품 발매
이 게임의 개발사인 ‘DIS’라는 회사 이름은 생소하겠지만, 야구게임의 명작 ‘하드볼(Hardball)’ 게임 시리즈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많을 것이다. 그 외에도 유명한 게임들을 많이 개발했는데 주로 아케이드용 게임들을 PC용으로 컨버팅하는 일을 많이 했다.

‘After Burner(DOS, SEGA)’, ‘Out Run(DOS, SEGA)’ 나 ‘Castlevania (DOS, Ultra Games)’, ‘Wings of Fury(DOS, Broderbund) 같은 게임들을 개발했다. ‘4D Sports Boxing’ 게임은 국내에서도 ‘동서게임채널’이라는 유통사를 통해 정식 출시되기도 했었다. 그 때 이 게임 패키지 가격이 1만6000원인가 그랬는데 그 당시 웬만한 어드벤처 게임들이 2만5000정도의 가격임을 생각해 볼 때 많이 비싸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7000원짜리 게임들도 많았다).

‘4D Sports Boxing’ 게임은 여러 각도에서의 카메라 시점을 제공하는 ‘멀티앵글’ 과 리플레이 기능을 제공했다. 그 당시에는 굉장히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지금 스포츠 게임들은 당연히 제공되는 기능들이지만, 무려 20년이 지난 게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게임이기는 하다.

게임 이름에는 버젓이 ‘4D’라고 적혀 있지만, 실상 이 게임은 ‘4D’보다는 한 차원 낮은 ‘3D’ 게임이다. 실제로도 ‘버처 파이터’보다 2년 먼저 등장하여 세계 최초의 폴리곤 기반의 대전액션 게임으로 기록되어 있다(최초의 3D 게임은 아니다). 게다가 아직 세상이 XT(8086, 8088 CPU) 컴퓨터나 AT(80286) 컴퓨터들이 대다수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 사양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했던 점이 인가의 요인이었다. 물론 386 이상의 PC에서 쾌적한 플레이를 하는 친구 놈들이 부럽기는 했지만, 필자의 컴퓨터 286, VGA 컴퓨터에서도 충분히 잘 돌아갔다.

그리고 ‘4D Sports Boxing’과 ‘하드볼(Hardball)’시리즈로 유명한 게임 개발자 크리스 타일러가 제작에 참가하여 최초의 3D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기록된 ‘토탈어니힐레이션(Total Annihilation)’이라는 게임의 등장으로 ‘스타크래프트’를 개발하던 ‘블리자드’는 충격에 빠진 일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토탈어니힐레이션’이 발매되자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개발진들은 게임 개발의 의욕마저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 블리자드‘너 지금 떨고 있니?’–크리스테일러. 사진 출처=http://www.pressplaytv.com
그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게임은 시장에서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그때까지 만들고 있었던 ‘스타크래프트’게임을 전부 뒤집어 엎어버리는 결단을 내리고 만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스타크래프트’가 등장할 수 있었을 테니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정확히는 게임의 개발자가 준 영향인가?).

‘토탈어니힐레이션’ 게임이 북미기준으로 1997년 9월 30일 출시이고,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가 1997년 12월부터 1998년 2월까지 베타 버전이 일반 테스터들에게 배포되었는데, 아마 ‘토탈어니힐레이션’이 조금 더 늦게 등장했더라면, 기존 그대로 ‘스타크래프트’가 조금 더 빨리 출시되었을지도 모르겠다(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졌을지도..).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에 정말로 그가 ‘4D Spots Boxing’ 게임을 통해 성공작으로서 의미 있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 게임 개발자로서 남아 있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랬다면 오래 뒤에 등장 할 ‘토탈어니힐레이션’ 게임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스타크래프트’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게임과는 많이 다른 게임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소 억지스럽게 결론을 내자면, 지금의 ‘블리자드’를 있게 한(중요한 영향을 끼친) 게임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4D Sports Boxing’ 이다(뭐 스타 아니었어도 워크래프트 시리즈로 잘 나갔을 것 같긴 하지만..).

■ 필자의 잡소리
한때는 이 게임에 빠져서 온갖 시름을 게임 안에서 풀던 시절이 있었다. 못난 생각이기는 하지만, 때려주고 싶은 미운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 게임 안에서 풀곤 했는데, 상대방 얼굴(사진)을 적용하면 상대방 선수로 등장하게 하는 권투 게임도 재미있을 듯하다(초상권이라던가 그 밖에 다른 법적인 문제가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 앜, 얼굴은 때리지마 이 자식아!
최근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복싱 게임을 만들려고 했지만, 자체 디자인이 안 되는 어려움으로 프로젝트가 홀딩된 적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만들어 보고 싶은 게임 중에 하나가 바로 권투 게임이다. 게임이 만들어지면 ‘어린 시절 나에게.. 권투라는 스포츠의 재미를 알게 해 준 막내 삼촌에게 감사 드립니다.’ 라는 자막을 꼭 넣고 싶다.

한경닷컴 게임톡 큐씨보이 객원기자 gamecus.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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