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생떼같은 외아들 사망 큰 상처, 장애인돕기 새 희망

“자포자기한 생, 노래와 봉사로 새 희망 찾았다”

이혼-생떼같은 외아들 사망 큰 상처

장애인 돕기 활동 통해 새 희망 찾아

‘운명같은’ 새 남편과 연예인봉사 첫발

효창공원 가을 나들이에 나선 가수 이영화.
이영화(59)는 가수다. 그것도 32년 차 중견가수다. 1989년 ‘실비 오는 소리에’로 데뷔했다. 이듬해 10대가수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81년)로는 MBC서울국제가요제 빌보드상을 탔다. 특히 20여명의 유명가수를 흉내낸 그의 모창메들리는 4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당시 각 레코드 가게에는 12가지의 모창 짝퉁음반이 나돌았다. 용기가 없어 거절했지만 일본에서도 ‘일본가수 모창’으로 활동하자는 러브콜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의 노래 너머 삶은 굴곡이 많다. 이혼과 생떼 같은 외동아들의 갑작스런 사망 등 그의 삶은 맨살을 후벼 판 것처럼 깊은 생채기를 냈다. 특히 “자살까지 생각하게 만든” 아들의 사망 이후엔 얼굴에 웃음기마저 사라졌다. 우울증까지 겹쳤다.

그런 그를 수렁에서 건져준 게 ‘운명 같은’ 남자였다. 지금의 동갑내기 남편 정병하씨다. 남편은 어딜 가나 항상 그의 손을 잡아준다. 그 덕에 밝아지고 우울증도 이겨냈다. 남편의 권유로 ‘웃음치료사’ 자격증도 땄다. 희망은 점점 자라 이제 ‘이영화’ 이름을 걸고 ‘말기암 환자’ 자원봉사, 어려운 연예인 돕기에 나선다. 영화연예인선교협의회 대표가수 이영화를 투명한 가을빛이 쏟아지는 서울 효창공원에서 만났다. 

■ 결혼 숨기고 가수 데뷔 “눈 떠보니 스타”

이영화는 어렸을 적부터 이미자, 박재란 등 유행가를 잘 따라불렀다. 유행가나 클래식, 일본 노래 등을 다 잘했던 아버지의 영향도 받았다. 주위 어른들도 “유별나다”며 앉혀놓고 노래를 요청하곤 했다.

고교 졸업 무렵 아버지가 부도를 맞았다. 철없는 나이에 반항심으로 남자를 만나 덜컥 아이가 생겼다. 스물한 살 나이에 결혼했다. 그래도 막연하게나마 가수가 될 것 같았다.

스물다섯에 한 업소의 밴드마스터가 “놀러오라”고 한 것이 현실이 되었다. 업소에서 작곡가 전재학씨를 만났다. 전씨는 이영화를 보자마자 “가수하라”고 권했다. 대신 “제2의 이미자는 있을 수 없다”며 클래식 발성법으로 피나는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애 엄마가 아니라 처녀로 속이고 데뷔했다. 데뷔곡 ‘실비오는 소리에’는 비가 유난히 많이 오던 이듬해 연말, 10대 가수상 신인상을 선사했다. 비가 올 때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눈뜨고 나니 스타가 됐다”는 말을 실감했다.

꽃 앞에선 이영화. 여전히 젊음을 과시하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가. 한 매체에서 “이영화는 애기엄마”라는 기사가 터져나왔다. 숱한 비난을 받았다. 인기는 하루 아침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좌절과 실망 속에서 전재학 작곡가는 방향을 바꿔 국제가요제에 나가자고 했다. 그는 81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로 MBC 국제가요제에서 3개 부문(국제가요제 연맹상, 빌보드상, 휘더프상)을 휩쓸었다.  

■ 음반 가게에 짝퉁만 12개, ‘모창 메들리 열풍’

이영화를 기억하는 팬들에겐 요즘 말로 싱크로율(닮은 점) 100%인 그의 모창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한다. 이은하, 나미, 윤복희, 윤시내, 임희숙 등 유명가수만 골라 20여명의 노래를 모창했다. 그의 음반 ‘모창메들리’(84)는 40만장 판매라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가는 곳마다 내 노래보다 모창을 신청해왔다. ‘모창 시키면 안나가요’라고 방송사에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모창 때문에 공연이 밀려들었다. 밤일만도 13군데를 한꺼번에 뛰기도 했다. 전라도에서 공연하고, 곧바로 서울로 이동해 또 공연했다. 2~3명이 교대로 운전했다. 차에다 놓은 침대에서 자면서 이동했다. 눈 뜨면 다시 노래했다.”

그는 군 위문공연 1위 가수이기도 했다. 같이 행사에서 만난 모창의 원가수는 “내가 항상 뒤에 해야지. 앞에 하면 안돼”라고 항의했다. 유명 가수만 모창을 하다 보니 모창 안 해준 가수들이 판을 가져와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창력 없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불러줬다.

그는 “한 번은 지방에 공연하러 갔다 한 레코드점을 들러 ‘제 음반 줘보세요’ 했더니 짝퉁 음반을 주더라. 둘러보니 모창메들리 짝퉁이 12가지나 진열돼 있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40만장이 팔린 이영화의 ‘모창메들리’ 음반 재킷.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서 땀 흘린 근로자들도 열렬한 팬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도 “일본가수를 모창(모노마네)하면서 일본서 활동해보자”는 제안이 쇄도했다. “히바리 등 웬만한 노래 다해봤다. 일본에 한두 번 갔다 왔지만 용기가 안 나고 겁이 많아 포기했다.”  

■ 이혼과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절망의 구렁텅이’

잘 나가던 그의 가수 생활이 휘청댄 건 88년, 남편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다. 방송활동도 침체에 빠졌고 2년 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모든 상황이 힘들었다. 93년 “돈을 벌기 위해” 트로트 디스코곡 ‘날이 날이 갈수록’을 발표했다. 방송사들도 반신반의했지만 다행히 히트를 쳐 재기에 성공했다.

재기는 짧았다. 외동아들이 2002년 스물아홉 한창 나이에 갑자기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아들은 귀가 안 좋아 군대도 못가고, 자취하며 작곡 공부를 했다. 어느 새벽 갑자기 가슴이 아파 걸어서 홀로 병원으로 갔지만, 응급실에 들어간 지 20분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도 없었다. 계속 까무러쳤다. 시신조차 볼 자신이 없었다. 자살까지 생각했다.” 이듬해 어머니가 그 다음해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고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댔다.

너무 힘들어 “살려달라”며 하나님에게 매달렸다. 성격상 주고 베푸는 사람이지만 누구를 의지해본 적이 없었다. 방송사에 노래를 하러 가서도 대화도 웃음도 없이 한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끼’를 속일 수 없었지만 무대 밖에서는 “건방지다” “싸가지 없다”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까지 했다. 

■ “봉사가 내 존재 이유” 영화연예인선교협의회

그러던 중 2004년 충북 청원에 있는 1급 지체장애인시설 ‘청애원’의 복지재단 후원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혼과 외아들을 잃은 절망으로 자포자기하려 했던 그의 인생은 봉사활동을 통해 슬픔을 이겨냈다.

그는 “1년에 한두 번 그들을 위해 기부금 콘서트와 후원의 밤을 열어 후원자를 만들었다. 직접 방송에 나가 홍보도 했다. 그 덕분인지 노래 한 곡 해주고 싶어도 녹음시설이 없던 청애원은 재작년에 신축건물을 지었다”고 기뻐했다.

이영화가 장애인 시설 ‘청애원’에서 봉사활동하는 모습.
이제 이영화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이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며 오토매틱으로 손잡고 다니는 남편 정병하씨가 든든한 매니저요 멘토다. “나중에라도 ‘이영화가 좋은 일 많이 하고 갔구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이름 걸고 해보라”는 서울 마포 공덕동 우리교회 목사님의 권유도 한몫했다.

이영화는 “임종을 기다리며 20일 시한부 인생을 사는 말기암이나 AIDS환자, 연예인으로서 남들의 도움조차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우선 돕고 싶다”고 말했다.

봉사활동에 뜻을 같이할 동료들도 모았다. 가수 고영준, 현당, 이영숙과 탤런트 김동현도 동참의사를 밝혔다. 그는 “데뷔할 때부터 음성 꽃동네 등에 데리고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깨우쳐주었던 전재학 선생님이 생각난다. 같이 음성에 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이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아낌없는 봉사의 삶을 살고 싶다”고 의지를 밝혔다.

가수 활동도 계속한다. 지난 3일 그는 모창으로 이름을 날릴 때 자주 부르던 윤복희의 ‘여러분’을 KBS ‘가요무대’(10일 방송)에서 녹화했다. “더 이상 가수활동 안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아깝다. 당신의 노래엔 혼이 담겼다’며 계속하라고 권했다"는 중견가수 이영화. 그는 ”제 방송 꼭 봐주세요”하며 활짝 웃었다. 박명기 기자 20111006 

팁 ‘운명의 남자’와의 뒤늦은 열애

가수 이영화와 남편 정병하씨의 만남은 드라마틱하다. 17년 전 정씨가 해운대 하얏트 호텔에서 킥복싱 대회를 개최했을 때, 정씨의 친구가 이영화와 통화를 했다. 대뜸 바꿔달라고 해 목소리로만 만났다.

닭살부부로 늦깎이부부의 애정을 자랑하는 이영화-정병하 부부.
이들이 실제로 만난 건 7년 전. 이영화가 이혼한 후 아들을 잃고 힘들어 할 무렵이었다. “결혼 안하고 친구처럼 지내자”는 이영화의 제안에 부산사나이 정씨는 “그랍시데이”라고 했다. 그후 전화가 잦아지고 프로포즈를 해왔다. 이영화는 “목회자의 길을 가라. 그러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며칠 연락이 없다 “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머니의 유언 비디오도 둘 사이에 노둣돌이 되었다. 정씨는 30년 권사를 지낸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만, 임종은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제발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 믿는 여자 만나 결혼하라”는 비디오 영상 유언을 남겼다. 평생 근처에도 안갔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이영화와 웨딩마치를 울렸다.

신학대 4학년생인 정씨는 “처음 영화씨 만날 때 수심 많고, 말도 없었다. 병을 고치는 길은 웃음이 최고다. 웃기고 손잡고 놀러다니다 보니 밝은 얼굴로 돌아오더라”고 했다.

둘은 실제로 닭살커플이다. 정씨가 서울에 온 지 4년 6개월. 지금까지 혼자 다닌 적이 없다. 항상 손을 잡고 같이 다닌다. 정씨의 권유로 이영화는 ‘웃음치료사’ 자격증도 땄다. 정씨는 “딸과 코드도 잘 맞고, 미역국만 끓일 줄 알았던 요리 실력도 책으로 공부하더니, 이제 반찬도 잘한다. 100점만점에 100점”이라며 산 같은 덩치도 잊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박명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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