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중 '영겁의 2초'-사제만 7개 '힐러 전문가'-군대보다 싫은 '게임 속 무용담'

얼마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 남자 사람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레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한동안 게임하는 것 때문에 맨날 싸웠어. 도대체가 이해를 못하더라고. 그런데 어제 게임이 얼마나 재밌길래 매일 그렇게 하냐며 자기한테도 게임을 가르쳐 달라는 거야. 그래서 엄청 감동했어. 날 위해 게임을 배우겠다는 거 아냐”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정말 감동일 것 같다. 여친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게임을 배워보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예쁜 마음인가. 하지만 그녀가 이런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싸움과 분노와 번뇌가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번주 레알겜톡은 게이머가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게이머 남친에게 화날 때(혹은 짜증날 때)를 꼽아보겠다. 물론 레알겜톡인 만큼 친구들과 본인의 리얼한 경험담을 바탕으로 뽑은 순위다.

#1. 영겁의 2초

시간은 밤 11시.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깨끗하게 씻고, 웹툰도 다 봤고,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통화하기 딱 좋은 시점이다. 유난히 피곤한 하루라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함께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전화를 건다.

“오빠 *ㅅ* 어디야아?” “응! 나 겜방”
“아 진짜? 집에 언제 가는데?” “이거 한 판만 하고 가려구!”
“얼마나 걸리는데?” “나 한 30분?”
“음.. 알았어. 이따 전화해!” “응! 알았어!”
(30분 후)
“아직 안 끝났어?” “어, 이제 곧 끝나. 왜?”
“아니, 그냥 자기 전에 통화하려구.” “응, 얘기해! 괜찮아.”
“아, 오늘 완전 피곤한 하루였어. 부장님이~$%^!@” “응” “응” “...” “...” “...”
“???? 지금 내말 듣고있지?” “............어? 응! 듣고 있지”

너무나도 진부한 대화지만, 위 상황에 놓인 연인들에게는 쫄깃한 대화다. 여기서 빡침(?) 포인트는 몇 개일까?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무난하고 인자하게 보자면 2개 정도다. 하나는 30분 후에 끝난다고 했는데도 아직도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나와의 통화에 100% 집중하지 않고 2초의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 이를 보면서 ‘난 정말 듣고 있었다. 다만 대답이 조금 느렸을 뿐이다. 겨우 2초였는데 왜 그러냐’라며 억울해 할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2초는 초침이 두 번 움직이는 2초가 아니다. 영겁의 2초다. 이 순간은 ‘난 너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보다 0과 1로 이루어진 게임이 더 소중하단 말야?’라며 서운할 수 있다.

▲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커플의 대화
유부남들 사이에 흔하게 전해지는 명언 중 하나는 ‘임신한 부인에게는 특히 더 잘하자. 열 달만 고생하면, 십 년 편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게이머 남친들에게는 ‘통화하고 싶은 여친에게 잘하자. 20분 고생하면 2시간 편할 수 있다’고 전하고 싶다. 만약 당신과 함께 대화하며 힘들었던 하루를 위로받고 싶은 여자 친구의 마음을 조금만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게임을 한다고 해서 삐질 일은 없어질 것이다.

#2. 나는 사제, 치유성, 소라카밖에 할 줄 몰라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체감상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직업은 바로 사제다. 그런데 사실 사제는 게임을 잘 모르는 여성이 플레이하기엔 고난이도의 직업이다. 힐(치유) 특성이 두 가지인 만큼 스킬의 종류도 다양하며 복잡하고, 큰 힐이 빵빵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천때기(천 계열, 약해서 휴지라고 비아냥하기도 함)라 체력도 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유는 뭘까? 캐릭터들이 대체로 예쁜 탓도 있지만, 남자들의 은근한 추천도 무시할 수 없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며 흑마법사를 할까, 사냥꾼을 할까 고민하던 순진한(?) 기자에게 사촌 오빠는 사제를 적극 추천했다.

그는 “흑마랑 냥꾼은 별로 재미없어. 힐러가 최고야. 사제마마님이지. 인던(게임에서 유저를 위해 별도로 생성한 지역)도 3초 만에 떠. 내가 법사로 같은 천 계열이니 인던에서 먹는 (힐러)아이템은 다 너 줄게“라는 달콤한 말로 기자를 꼬셨다.

‘왜 그런 좋은 사제를 사람들이 안할까?’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결국 사제로 게임을 배웠다. 사제가 ‘사제마마’인 이유는 있었다. 개체수가 적기 때문이다. 힐러는 딜러(공격자)보다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의 최대치가 다르다. 남들은 게임할 때의 재미를 ‘다른 플레이어를 써는 맛’ 혹은 ‘딜 뽑는 맛’이라고 한다면, 힐러는 ‘체력의 빈칸을 채우는 맛’, ‘집단 공격에도 끝까지 안 죽고 살아남는 맛’이라 말한다.

첫 단추를 힐러로 꿴 기자는, 여전히 힐 전문이다. 딜러를 해볼까 해도 다시 처음부터 키울 엄두가 안나는 것은 물론, 도통 딜에 대한 감이 안 온다. 여자 친구가 게임을 시작한다면,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지는 말자. 그 것이 게임을 오래,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비결이다.

#3. 군대 얘기, 축구 얘기,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보다 싫은 얘기는?

남자들끼리 모여 즐겁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소재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군대 얘기, 두 번째는 축구 얘기, 세 번째는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다. 이는 여자들이 지루해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친구 뒷담화, 화장품 얘기, 뒷담화하는 친구가 바른 화장품 얘기를 하면 남자들이 지루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뛰어넘는 지루한 소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게임 속 무용담이다. “내가 어제 혼자 라인을 밀고 있는데, 갑자기 상대편 세 명이 쳐들어온 거야. 그래서 수풀 속에 숨었다가 튀어나와서 한 명을 순삭(순식간에 삭제)하고, 한 명은 묶어두고, 한 명하고는 치열하게 싸우다가 결국엔 3:1을 이겼지. 어제 내가 혼자 게임 다 했어(뿌듯).”

여자들이 “나 오늘 눈썹 완전 잘 그렸지? 엄청 공들인 거야”라며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한다고 생각해보자. 학교 축제날 진행되는 강의보다 지루할 것이다. 게임 속 무용담은 게임 속에서, 혹은 커뮤니티나 게이머 친구들 사이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아껴두자.

한경닷컴 게임톡 황인선 기자 enutty4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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